하노이에서 받은 베트남의 첫 인상은 익숙하지 않은 후텁지근함이었다. 5월 3일 인천공항을 출발할 때 서울은 늦봄같지 않게 무더웠음에도 하노이의 날씨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은 장마가 막 지난 찌뿌둥한 한여름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베트남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제공한 버스는 시원해서 산뜻한 느낌으로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노이 시내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독특한 건물의 모습이었다. 우선 색상이 독특했는데 모든 건물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황색’이었다. 밝은 노란색은 아니고 약간 바랜 듯한 황색인데, 특히 오래된 건물일수록 그랬다. 두 번째로 독특한 점은 앞쪽으로 평면이 좁고 여러 층으로 높으며 뒤쪽으로 깊게 구성된 건물의 생김새였다. 도로 주변으로 줄지어 늘어선 집들의 모습은 마치 유럽의 이름 모를 주택가를 보는 듯했다. 폭이 좁고 높은 건물은 인구의 밀집도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적한 시골의 도로변에서도 이런 형태의 집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외부 문화의 경험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느 원로 베트남사 연구자의 지적에 따르면 베트남의 역사 연구는 ‘민족독립투쟁사관’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 프랑스, 미국 등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외세와의 충돌과 그에 따르는 문화 변용은 베트남 역사의 초기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그중 근현대의 문화 충돌이 지금과 같은 건물의 모양을 자아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엿본 베트남역사박물관
그렇다면 베트남의 문화 충돌과 변용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베트남사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게 진행되었고 한-베 간의 교류사 역시 조금씩 지평을 넓히는 추세다. 다만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지한 필자의 입장에서 가장 쉽게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이야말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베트남 사회과학연구원의 배려로 베트남역사박물관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베트남역사박물관은 하노이 호안키엠 지역에 있는데 원래는 프랑스 식민 시기인 1910년 극동프랑스학교 고고학연구소였다. 1926~1932년 어니스트 에브라(Ernest He'brard)에 의해 재설계되었고 이후 1958년 베트남 정부로 이관될 때까지는 미술관이었다고 한다. 전시 공간은 크게 1층과 2층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 층별로 별도의 전시실을 두어 전근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조망할 수 있다.
우선 정문에 들어서자 맨 처음 우리를 맞이한 문화재는 청동북[銅鼓]이다. 베트남의 청동기 문화인 동썬(東山)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이미지로만 보던 것이었다. 언뜻 청동으로 만들어진 북이란 것 외에 별다른 것은 없어 보이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표면에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앙에 태양을 상징하는 무늬를 비롯하여 점점 외곽으로 동심원을 따라 날아가는 새, 사람, 집, 배, 동물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베트남 사회과학연구원의 심벌도 청동북의 태양문과 새문양을 차용해 형상화한 것을 보면 베트남 역사의 문화상징이 되어버린 이 청동북과 청동기 문화에 대한 베트남인의 자부심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박물관에서 주목한 것은 선사-고대의 유물이었다. 청동북과 같은 베트남 고유의 청동기 유물도 있지만 우리 눈에 아주 익숙한 청동기 유물과 고대 유물도 즐비했다. 다음 사진들은 마치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사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이 닮아 있다.
공통의 역사적 전통을 가진 한국과 베트남
베트남의 역사는 고대 사회로부터 중원 국가의 내침을 받아왔고, 이러한 침입의 결과 중원의 문화가 상당수 이식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은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에서 교지(交阯) 지역의 풍물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베트남이 한(漢) 이후 수(隋)에 이르기까지 중원 국가의 변경을 끊임없이 괴롭혔다고 지적하였다. 최치원의 〈보안남록이도기〉는 9세기의 기록이지만 재단에서 출간된 《역주 중국정사 외국전》을 찾아보면 《전한서》와 《후한서》 단계에서부터 교지 등 베트남을 지칭한 국가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원사》와《명사》에서는 아예 안남전(安南傳)이 권(卷) 하나를 차지하며 입전되어 있을 정도로 비중있게 서술되고 있다. 이는 전쟁이든 교류든 베트남과 중원 국가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그 사실은 베트남역사박물관의 전시실에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전시된 유물들에서도 확인된다.
따지고 보면 베트남은 이른바 ‘국난극복’의 역사를 가졌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 이후 식민지 극복의 ‘독립운동’ 전통으로도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한국사에도 끊임없는 외침에 대한 극복이 일제강점에 대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러한 흐름은 베트남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우리나라와 베트남 공히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한편으로는 외국의 문화를 수용하여 내재적 발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공통의 역사전통을 베트남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출장은 베트남 사회과학연구원과 공동의 역사연구를 위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협력모델을 공유하자는 협약체결이 목적이다. 컨퍼런스에서는 두 나라의 역사와 영토·해양에 대한 다양한 협력연구의 아젠다를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두 기관이 역사연구에서 협력 방법을 모색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는 것은 이번 출장에서 거둔 커다란 성과다. 이러한 성과에 못지않게 베트남역사박물관을 비롯한 탕롱황성(昇龍黃城), 문묘(文廟), 하노이전쟁박물관 등 하노이 지역 답사는 베트남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고 했던가? 물 한 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내려면 첫 방울이 중요할진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난(至難)한 연구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 필요하겠다. 베트남역사박물관에서 느꼈던 새로운 인식은 앞으로 지속될 한-베 역사 연구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