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개봉한 영화 <묵공(墨攻)>은 일본 사케미 겐이치(酒見賢一)의 소설과 모리 히데키(森秀樹)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한·중·일 합작영화이다. 각본 및 연출은 홍콩의 장즈량(張之亮)이 담당했고, 중국의 류더화(劉德華)와 판빙빙(范冰冰), 한국의 안성기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기원전 370년) 전 군웅할거와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 조나라 십만 대군이 연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연나라 부속이었던 양성(梁城)을 공략하였고, 이에 백성을 포함해 불과 4,000명에 불과했던 양성은 여러 차례 위기에 몰리지만 묵가(墨家)의 도움을 받아 끝내 조나라를 물리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제목과 배경 선정에 대한 아쉬움
영화 <묵공>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제목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자칫 ‘묵가의 공격’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묵가에서 ‘공(攻)’은 ‘침략’의 뜻으로 정의로운 전쟁이란 의미의 ‘주(誅)’와 대립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묵가는 전쟁 자체를 반대하지 않지만 침략 전쟁은 단호히 비판하고 적극 대응하며, 방어 전쟁에는 자신들이 고안한 무기를 제공하거나 기술자와 병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이념이 반영된 것이 묵가의 ‘비공(非攻)’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묵공>의 또 다른 제목은 ‘묵자공략’, 영문 제목은 ‘Battle of Wits(지략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영화의 제목을 ‘묵가의 지킴’이라는 뜻의 ‘묵수(墨守)’로 했다면 어땠을까? 원래 이 용어는 묵가의 조직과 특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화의 모티브와도 관련이 있다.
묵가의 거자(鉅子, 최고 지도자) 맹승(孟勝)이 초나라 양성의 군주와 방어 전쟁을 계약하고 신물(信物)로 부절(符節)을 나누어 가졌다. 그 뒤 양성군이 초나라 조정의 대역죄에 연루되어 달아나자 초나라 왕은 양성을 접수하려고 하였다. 묵가의 제자들은 맹승에게 계약 당사자 양성군이 없으므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맹승은 “우리가 도망친다면 향후 아무도 묵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자살하였고, 이 때 따라죽은 자가 183명이었다. 심지어 차기 거자 지명을 알리고자 탈출하였던 자들도 되돌아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실제 영화의 설정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영화는 소설과 만화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이지만 오히려 맹승의 일화를 토대로 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천쉬에량(陳雪良)의 《묵자 연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주나라 안왕 21년(기원전 381)의 일이다. 원작을 접하지 못해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에 제시된 연대와 10여 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양성이 연나라에 병합된 뒤 조나라 침공에 대한 수성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지리적으로 초나라는 가장 남쪽 지역이고 조나라와 연나라는 인접국으로 북쪽에 있었다. 따라서 맹승의 일화에 나오는 양성과 영화의 배경은 다른 것이어야 한다.
묵가의 겸애 vs 유가의 편애를 보여주는 내용
<묵공>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주인공 꺼리(류더화)가 공성전의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통해 ‘겸애’의 의미와 한계를 교차시켜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선 꺼리는 묵가 집단의 신물을 지니지 않은 채 홀로 양성에 도착한 탓에 첫날밤을 마구간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나 끝내 관료와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 공성전을 승리로 이끈다. 다음으로 여주인공 이위에(판빙빙)가 적극적인 스킨십을 주저하는 꺼리에게 “세상사에서 때로는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는데 겸애만을 주장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이 영화의 유일한 로맨스신은 무미건조하게 막을 내린다. 또한 꺼리는 평민과 노예를 차별 없이 대하고 전쟁 속 희생자에 대해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안타까워했다. 때로 “적을 죽이는 것이 최선인가?”라고 자문하며 심적 갈등을 숨기지 않다가 결국 땅굴파기에 동원된 조나라의 노예를 탈출시킨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는 노예의 물음에 꺼리는 “사람을 죽여야 하나?”로 답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주인공 꺼리의 스포츠형 두발 모양과 탈출시킨 노예가 삭발한 서양인이라는 점이다. 탈출한 노예는 나중에 적극적으로 꺼리를 돕는데 “겸애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할 줄 모르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이것은 묵가의 겸애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입장으로 예를 들면 제자백가 중 가족주의와 차별애를 강조하는 공자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영화에서 꺼리와 조나라 장군 샹얜종(안성기)은 두 차례 담판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샹얜종은 오직 “살아남아 돌아가는 것이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꺼리에게 그것은 희생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편애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꺼리가 양성의 방어에 성공한 뒤 홀로 고아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묵가가 당시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를 보여준다. 묵가의 확고한 신념의 근저에는 “남을 사랑하면 남도 반드시 나를 사랑한다”는 ‘하느님의 뜻’이 있었다. 따라서 일시적인 성공과 실패는 묵가의 꺼리에게 주요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공성전에서 꺼리가 보여준 축성 방식과 전투 기술 등은 후기 묵가의 작품으로 알려지는 《묵경(墨經)》에 전해진다. 예컨대 수성하기 위해 옹성을 쌓는 방식, 해를 등지고 적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활을 쏘는 법, 대소변을 모아 초가지붕에 발라 화공에 대비하는 일, 땅굴을 파서 공격해 올 때 탐침봉을 꽂아 소리를 감지하거나 구멍에 물을 부어 물 높이의 변화를 살피는 일 등은 모두 이에 근거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6천만 명이 관람했다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까닭은 아마도 관객 대부분이 묵가에 생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중국 영화의 특징인 웅장한 스케일에 비해 청중을 몰입시킬 만한 장면이 부족했다는 점도 아쉽다. 역사를 소재로 한 중국 영화는 사회주의 체제 이념을 선양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이 진시황의 입을 빌어 천하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전제주의를 합리화한 것이라면 <묵공>은 일찍이 중국 고대에 ‘겸애’라는 평화 이념이 있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중화민족주의를 부각시킨 것 아닐까. 아마도 현대 중국에게는 수많은 소수민족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를 이루는 게 가장 절실한 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