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4일에 개봉한 영화 귀향(鬼鄕)이 이 글을 쓰는 4월 15일 현재까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전체 관람객은 368만 명을 넘어섰다. 처음 개봉 소식이 들렸을 때 상영관 확보와 흥행 성적을 걱정했던 것을 생각하면 흐뭇한 전개다. 이로써 나 또한 영화에 관해 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정의롭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영화 흥행을 걱정했다. 그러나 영화를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부모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자라던 14세 소녀가 일본군에게 끌려가서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내용을 굳이 큰 화면으로 보면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재 그 피해가 드러난 조선인 출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수는 294명이다. 피해자 생활지원을 위해 한국정부가 파악한 피해등록자가 238명 –그 가운데 생존자는 익히 알려져 있듯 현재 44명이다-, 한국정부 등록 이전에 사망했거나 국적문제로 등록이 되지 않은 피해자가 16명, 북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 피해를 밝힌 피해자가 40명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이 최대 2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294명이라는 피해자 수도 전체 피해자 수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공개 출판한 구술집을 통해 피해 내용과 고통의 자장을 확인할 수 있는 피해자는 70여 명이다. 나는 연구와 문제 해결을 위해 증언집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몹시 고통스러웠다. 내 성욕은 병들어가는 것 같았고, 우울한 감정이 계속 덮쳐왔으며,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이 때문에 구술을 읽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성폭력 순간들을, 영화를 통해 굳이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괴로움
어째서 성폭력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자임을 "인정" 또는 "동의"받기 위해서 그 성폭력이 강제와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것이었으며, 가해자가 비정상이었음을 끊임없이 제시해야 하는 것일까.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2004)에서 다른 이의 고통을 과잉 이미지를 통해 스펙터클로 소비해버리는 현대인의 교양과 여가 태도를 비판했다. 칸칸이 매를 맞고 강간을 당하는 '위안부'들의 방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관객들의 마음에 스며든 감정'들'은 분노만이었을까. 다른 감정들은 차치하고 분노만을 따져본다고 해도, 전쟁과 식민지를 벗어난 뒤에도 끊임없이 성폭력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분노로 어떤 얘기들을 할 수 있을까.
〈귀향〉이 '위안부'들이 겪은 폭력을 과장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배경인 1943년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牧丹江) 주변은 영화 모티브인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을 그린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강일출이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은 곳이다. 중국 동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만주 지역은 1941년을 전후해서 일본군이 3배 이상 급증한 곳이다. 관동군이 소련하고 벌일 전투에 대비해 1941년 7월부터 관동군특종연습을 시작하고 만ᆞ소 국경 지역에 군대를 집중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인 여성 2만 명을 '위안부'로 둘 것을 계획하고 실제로 3천~8천명을 동원했다. 관동군의 군기 해이는 유명했으며, 중국군과 한국인으로 이뤄진 항일군과 크고 작은 충돌이 많아서 경계가 삼엄했다. 그 때문에 피해자들은 일본군이 가한 폭력 정도와 빈도가 심했음을 유난히 많이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강일출도 조선인 항일군과 연락을 하고 있었던 위안소 관리 일본군인의 도움으로 죽음 직전에 구출되어 위안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구술했다.
따라서 영화 〈귀향〉의 여성들은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 높고, 시설이 열악하며, 일본군의 폭력이 방치되거나 조장되는 지역에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위안부'들이 당하는 폭력뿐이다. 역사 맥락은 사라지고 괴물 같은 일본군과 순진한 소녀들만 대치하고 있다. 조선인 '위안부'를 연민하는 일본군 소년과 상대방 처지에 공감하는 '위안부' 여성들의 연대가 나오는 것은 분명 이 영화를 반짝 빛나게 하는 지점이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영화의 색깔을 덧칠하기에는 그 구조가 너무 앙상하다.
성폭력으로 성폭력을 얘기하는 방식은 피해자를 다시금 트라우마에 빠뜨릴 수 있게 하는 위험한 방식이지만, 관객들은 폭력의 스펙터클을 숨죽여 지켜보고는 '위안부'문제를 알게 됐다고 얘기한다. 진부한 방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심각성, 다시 말해 전쟁 성폭력 피해자의 심각성을 알리고,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방식인 것일까. 이는 20여 년 동안 시민, 학생들에게 특강 형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강의하면서 나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해온 문제이기도 하다.
평화와 인권에 닿는 풍부한 논의를 기대하며
인터넷에 넘치는 <귀향>에 관한 상찬을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영화를 본 내 머릿속은 복잡한데 반응들은 꽤 단조로워 낯설다. 의외인 것은 감동과 분노를 토로하는 누리꾼들의 글 일색인 상황에서 영화 평론가들은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영화에 관해서 다양하고 생산적인 논의가 적극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부하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결들을 포착한 이 영화를 보면서, 〈귀향〉 속에서 〈귀향〉을 넘어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귀향〉을 만들어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알리고 피해자를 위로하고 싶다는 감독의 진심, 열심히 연기한 배우들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영화 제작에 동참한 시민 7만5천여 명이 보여준 역사와 현실에 관한 책임감은 아무리 치하해도 모자라다.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연결하고 공감의 힘으로 치유해가는 영화의 중심 메시지도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평화와 인권이라는 관점으로 이 영화를 비판하거나 의미를 새기는 일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귀향〉 속 주인공 정민이는 어쨌든 따뜻한 부모 품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왔어도 집을 다시 떠나야 했던, 아직까지도 그 피해를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 침묵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더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우리들 마음을 여전히 아리게 하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전쟁과 성폭력으로 일상을 파괴당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