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기고
<심흥택 보고서> "본군 소속 독도" 후 100년
  • 정영미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1904년 9월 25일, 울릉도와 죽변 간 해저 전신 케이블 부설을 위해 울릉도로 파견된 일본 군함 니타카는 항해일지인 〈군함 니타카 행동 일지(軍艦新高行動日誌)〉(이하 〈니타카 보고서〉)에 "리앙쿠르 암을 한인(韓人)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우리나라 어부는 량코도라고 부른다"고 기록한다.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은 독도를 "타국이 이를 점령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는" 무주지로 간주,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붙이고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는 결의를 한다. 이어 2월 22일 시마네현 지사 마쓰나가 다케요시(松永武吉)는 독도 편입을 알리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발표한다.

1906년 3월 29일, 울도 군수 심흥택이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李明來)에게 그 전날 일본 관인(官人)들이 울도(울릉도)에 와서 "본군(本郡; 울도) 소속 독도(獨島)"가 일본 영지가 되었다고 말한 것과 울릉도 현황을 조사하고 간 것에 대해 보고한다.

1906년 4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는 심흥택이 보고한 내용을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고하고 "보내온 보고는 모두 읽었고, 독도(일본) 영지설은 전혀 근거가 없으니 그 섬의 형편과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다시 조사 보고하라"는 지령(지령문 제3호)을 받는다.

1905년 일본은 조선 사람들이 '독도'라고 표기하고 더 나아가 '본군 소속'이라고 단언하는 독도를 무주지라고 하여 편입하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군 소속 독도'가 독도 영토주권 근거로서 의미가 퇴색한 것일까?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심흥택 보고서〉 발굴 연혁

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 관헌의 독도 시찰과 울릉도 조사에 관해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했다는 보고서 그 자체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보고서가 있었다는 것과 전문이 1948년 신석호가 발표한 〈독도 소속에 대하여〉*에 소개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신석호에 따르면 이 논문은, 1947년 8월 16일부터 28일까지 약 2주간 민정장관 안재홍의 명령으로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 기술사 한기준과 함께 독도를 조사한 후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 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려고 쓴 것이라고 한다.

이 독도 조사는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주최로 실시한 울릉도 종합 학술조사와 같이 추진되었다. 신석호의 다른 논문〈독도의 내력〉**에 보면, 이 울릉도‧독도 조사는 같은 시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47년 미 극동위원회가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제도와 금후 결정할 주위의 제 소도에 한정"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연합국의 대일 기본정책에 힘입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 소식이 한국에 전달되어 한국에서 처음으로 '독도 문제'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남한 과도정부는 독도에 관한 역사 고찰과 현지 조사로 이 섬이 한국 영토임을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하기 위해 신석호 등으로 '독도조사단'을 구성하여 조선산악회의 '울릉도 학술 조사단'과 함께 파견한 것이었다. 이 때 울릉도 군청에서 '심흥택 보고서'의 부본(副本)이 발굴되었고, 신석호는 1948년 논문에서 "이 보고서는 울릉도청에 보관하고 있는 부본(副本)을 전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심흥택 보고서'는 지금 남아있지 않은데 이것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1950~60년대 한·일 독도 영유권 논쟁기에 한국 측이 〈정부견해 2〉(1954.9.25)에서 "원본이 현재 아국 정부의 공문서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1978년 4월 독도연구모임인 '한국 근대사 자료연구 협의회'가 결성되어 독도에 관한 종합 학술조사를 재개하였다. 이때 협의회 일원이었던 송병기(전 단국대 교수)가 〈각관찰도안(各官察道案) 1〉(의정부 외사국)에 편철되어 있는 '보고서 호외(報告書號外)'(1906년 4월 29일자)를 발굴하여 발표했다. '심흥택 보고서' 전문이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독도의 일본 영유를 부인하는 취지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내린 〈지령 제3호〉 내용도 수록되어 있는 이 문서 발굴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불법임은 더욱 확실해졌다.

이 보고서는 1905년 이전부터 울릉도민이 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섬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즉 일본이 불법으로 독도를 편입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자료인 것이다. 이 자료에 관해 일본 측 관계자는 "심흥택이 일본 독도 시찰단에게 독도에서 포획한 강치 한 마리를 선물로 받고 치하하였는데 만일 군수가 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취급하였다면 당연히 그런 응접은 안했을 것"*** 이라는 궁색한 반론이 있었을 뿐이다.

"본군 소속 독도"의 배경

사실 독도를 '독도(獨島)'라고 부른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까지 발굴한 독도 관련 고사료 중 '독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자료는 위에서 소개한 1904년 〈니타카 보고서〉고, 다음이 1906년의 〈심흥택 보고서〉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석도(石島)'로 표기한 것을 제외하면, 1910년 이전 고사료에서 '독도'라는 명칭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두 자료와 〈심흥택 보고서〉를 기사화한 1906년 5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의정부 참정대신의 〈지령 제3호〉도 함께 보도한 1906년 5월 9일자 〈황성신문〉이 전부다.

신석호는 "아마 고종 18년(1881) 울릉도 개척 후 울릉도 주민이 명명한 것 같으며"(〈독도 소속에 대하여〉)라고 추정하고 있다. 울릉도는 조선의 태종과 세종 때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쇄환하는 정책을 실시한 후 고종 18년까지 공식적으로 주민이 살지 않는 빈 섬이었다. 숙종 때, 안용복과 박어둔 사건(이른바 '울릉도 쟁계')으로 조선과 일본 간 울릉도 영유권 논쟁이 벌어진 것을 계기로 1695년 이후 2~3년에 한 번씩 관리들을 보내 울릉도를 수토(搜討)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으나, 고종 때까지 울릉도는 공식적으로 주민이 살지 않는 빈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 때, '조일통상장정'(1883)과 '조일통어장정'(1889)을 빌미로 일본 어민의 울릉도 불법 입도와 벌채가 심각해지자 고종은 울릉도 거주민 '모민(募民)' 과 울릉도 '개간(開墾)' 정책을 취해 울릉도를 유인도화하였고, 1883년 7월 처음으로 16가구 54명을 울릉도로 이주하도록 하였다고 한다.(공식 통계)

독도라는 명칭은 전라도 방언으로 '돌섬'이라는 의미인 '독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1883년 울릉도 개척민의 원거주지가 대부분이 경상도나 강원도, 충청도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889년에는 200여 호로 증가하였는데 원거주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울릉도 유인도화 정책 이후 공식 입도한 개척민의 출신지만 보면 신석호의 추정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울릉도에는 울릉도 개척민이 이주하기 전부터 전라도민이 다수 있었다. 울릉도 유인도화 정책을 취하기 전인 1882년에 고종의 명으로 수토관이 되어 울릉도를 조사한 이규원의 보고서 <울릉도 검찰일기>를 보면, 당시 울릉도에 조선인 141명, 일본인 78명이 있었고, 조선인은 전라도(흥양, 삼도, 초도 등) 115명, 강원도 14명, 경상도 11명, 경기도 1명이었다.***

한편 18~19세기 전라남도 흥양군(현재는 고흥군) 소속 초도와 거문도(삼도) 사람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보통 봄에 울릉도에 가서 향나무 등을 베어 배를 만들어서 가을에 돌아왔다고 한다. 거문도 서도 장촌에 400여 년 전부터 전승되어오는 '술비소리'(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1787년 5월에 울릉도를 '발견'하고 '다줄레 섬'이라고 명명한 《라 페루즈의 항해기》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 울릉도에 출어한 전라도 사람들이 독도까지 드나들었는데, 1962년 3월 19일자 〈민국일보〉에는 거문도 서도리에 사는 사람들이 1820년대부터 '돌섬'으로 지칭한 독도에서 가제(강치)를 잡았다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즉 문헌 기록으로는 남지 않았으나 이미 조선시대에 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독도를 전라도 방언인 '독섬'(표준어로는 돌섬)으로 불렀는데, 이것을 글자로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독'과 같은 음을 가진 한자의 '獨' 자를 빌어 '獨島'라고 표기한 것 같다. 1904년 〈니타카 보고서〉에 "조선인은 이 섬을 '독도'라고 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석도(石島)' 역시 '독섬'을 한자를 빌어 표기한 것인데 이때는 '독(돌)'과 의미가 같은 한자인 '石'을 빌어 '石島'로 표기한 것이다.

일본의 독도편입이 불법임을 보여주는 증거

〈심흥택 보고서〉의 "본군 소속 독도"는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 불법임을 생생하게 말해주는 증거 자료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증거력은 여전히 명확하다. 어떻게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학교 교육에 반영할 수 있을까?

다음에서 <심흥택 보고서>와 〈지령 제3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그 의문이 역시 의문으로 남음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