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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단 설립 10주년 기념 특집 재단에 바란다 지난 10년을 치열하게 성찰하고 새로운 10년의 비전을 만들기를
  • 진행 정리 · 강정미 (대외협력실 행정원)

2016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동북아역사재단 뉴스〉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재단의 활동성과를 점검하고, 재단의 발전을 위한 고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번 호에는 재단 초대 자문위원장을 지낸 백영서 연세대 문과대학장에게 동북아 역사와 영토 문제의 추이와 현황을 바탕으로 재단의 발전 방향에 관한 조언을 듣는다. -편집자 주-

백영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같은 대학 문학박사(중국현대사 전공).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주간, 중국근현대사학회 회장, 현대중국학회 회장 역임. 주요 저서로 《橫觀東亞: 從核心現場重思東亞歷史)》(2016), 《사회인문학의 길 : 제도로서의 학문, 운동으로서의 학문》(2014),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공생사회를 위한 실천과제》(2013), 《思想東亞: 韓半島視角的歷史與實踐)》(2009) 등이 있다.

Q 근황을 여쭙고 싶다. 현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연구 주제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백영서 지난 연말 계간 《창작과 비평》 주간 직을 10년 만에 물러나 좀 편히 지내나 했는데, 올 초 재직하고 있는 대학 문과대 학장이란 보직을 맡아 다시 바빠졌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 전에, 제도로서 인문학의 의미와 가능성을 실험하는 일에 깊이 간여할 소중한 기회로 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원래 계획한 새 저서 《한‧중 관계사 : 주요 에피소드로 보는 양국관계 60년사》(가제)를 집필하기 위해 관련 연구 성과를 읽으며 기본 구도를 짜고 있다. 한‧중 관계 60년사를 국가 간 관계(외교사)만이 아니라 양국 민간의 교류사(국경을 넘나든 사람 지식 물건)에도 주목해 서술하려고 한다. 그리고 양국 관계를 동아시아 맥락에서 해석할 것이다. 주로는 1950년대 이후 한‧중 관계의 여러 일화를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 상호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타이완과 북한도 시야에 넣을 것이다.

Q 중국의 근대 국가 건설과정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을 둔 국민혁명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 십 수 년 동안 독자적인 '동아시아론'을 활발하게 개진하였다. 중국사 연구자로서 동아시아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특별한 계기는 무엇인가?

백영서 1990년 여름, 미국 하버드-옌칭연구소 초청을 받아 방문연구원으로 1년 남짓 캠브리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학자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인 중국연구자로서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중국사 전공자인데 그곳에서 외국인들은 내게 한국 역사와 현실을 자주 물어서 당혹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 경험을 살리는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침 하버드대에 특강하러온 두아라(P. Duara)교수가 자신은 인도 출신 중국사 연구자로서 인도인의 종교에 관한 감각과 관심을 살려 중국사를 연구한다고 한 말을 듣고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귀국해 보니 한국은 중국 등 동아시아로 이미 뻗어나가고 있었고, 한국 안에 중국 조선족을 비롯한 동남아 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분단된 한반도 남쪽의 반국(半國)적 상상력을 넘어 동아시아 속 한국과 한국 속 동아시아를 동시에 바라보는 확대된 지리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던 것이다. 내 개인적 각성은 행복하게도 이 같은 시대요구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Q 동아시아 담론과 관련하여, 국내에서는 이미 '동아시아사'가 교과로 채택될 만큼 그 의의가 인정되고, 또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동아시아'에 호응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한‧중‧일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제 현실은 상황이 더욱 나빠지는 경향도 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동아시아'를 성찰하고 주장해 오신 성과나 의의는 무엇이며, 동아시아론이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백영서 1990년대 초부터 주창해온 동아시아담론이 '담론권력'을 얻었다고 국내에서 평가될 정도에 이르렀다. 중국어권에서도 어느 정도 반향이 있다고 보는데, 그 증거는 첫 중문 저서가 타이베이와 베이징에서 출간되었고, 전자는 작년에 2쇄도 나왔다. 올 3월 두 번째 중문저서가 타이베이에서 출간되었다. 일본어 저서도 올 5월 출간될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담론이 방금 지적하신 불안정한 동아시아의 현실을 돌파할 힘을 과연 갖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쉽게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제까지 동아시아 담론과 연대운동을 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위기는 오히려 변혁에 동력을 제공한다. 변화는 위기의식이나 위기감 없는 곳에서 이뤄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중국 대륙과 일본 본섬은 물론이고 홍콩·타이완·오키나와로 관심을 넓혀 직접 동아시아 근현대사 속 모순이 응집된 핵심 현장을 드나들고 있다. 그곳 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출로를 찾기 위해서다. 동아시아담론의 과제는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좀 더 구체화한 '핵심 현장' 시각과 '글로컬로지(glocalogy; 지구지역학)' 시각을 적극 끌어들여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란 것은, 서구 중심 세계사 전개에서 주체가 아니라고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 의식을 말한다. 그리고 글로컬로지란 것은, 지방적인 것, 지역적인 것, 전지구적인 것을 한 차원으로 결합하는 시각이자 방법인 동시에 연구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더 깊이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유감이다.

Q 재단이 벌써 설립 10년을 맞는다. 초대 자문위원장으로 초창기 재단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셨는데, 당시 어떻게 자문위원장으로 참여하게 되셨는지? 지난 10년의 재단을 평가하신다면?

백영서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김용덕 이사장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은사의 제안이라 거부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동아시아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에 자문위원장직을 맡았다. 당시 동아시아공동체 구현에 관한 사회의 관심이 자못 뜨거웠다. 그리고 '동아시아인'으로서 정체성 형성이 필요한데 역사화해는 정체성 형성의 핵심이 아닌가? 바로 이 역사화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신설한 것이 재단이니 의미는 그만큼 깊었다는 얘기다. 그러한 소임을 위해 출범한 재단의 지난 10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동아시아 역사화해 추동력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구, 정책 대안 제시, 교육과 홍보라는 영역에서 수많은 사업을 통해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예를 들어, 내가 전공하는 중국현대사 분야만 봐도 그간 연구 주제 변화에 미친 파장이 컸다. 중국의 역사교과서나 역사인식뿐만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과 민족이론, 제국론, 한‧중 관계, 변경연구 등등에서 많은 성과가 나오는 데 기여했다.

Q 2006년 한창 재단 설립을 준비하던 당시와 10년이 지난 지금 한・일, 한・중, 또는 한・중・일 사이 역사 현안과 갈등의 양상, 또 해결을 위한 당사국의 노력에 어떤 변화나 차이가 있다고 보시가?

백영서 10년 전에는 여러 나라에서 동아시아공동체에 관심이 높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다들 피부로 느끼듯이, 동아시아에서 경제교류는 늘었지만 정치와 안보 영역에서 갈등이 증가하는 불일치, 이른바 '아시안 패러독스'를 보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정체성 영역에서 집합적 역사기억의 유산이 중첩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커다란 혼동을 겪고 있다. 더욱이 그 혼동이 역외에 있는 미국의 "균형 잡기"로 겨우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런 지역구조 현상이 각자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계산하고 그것을 타파하려 나서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분쟁과 상호불신은 날로 커지고, 거세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 불신을 미봉책으로 무마하려는 시도만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좀 더 넓은 시각에서 한국사를 해석해야 중국을 위시한 세계를 설득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Q 특히 재단과 관련하여 '동아시아 역사가회의'를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사연구포럼'(이하 '포럼')이라는 정례회의를 지속해 왔다. 그 성과는 무엇이며, 향후 계획은?

백영서 '동아시아사연구포럼'은 2008년 재단이 주관하는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기구다. 그 해 국제회의 마지막 날인 12월 6일 당시 재단 김용덕 이사장이 제안하여 출발했다. 나는 초기부터 사무국장을 맡다가 현재 운영위원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규약에 적혀 있는 목적은 "동아시아 역사인식 차이로 발생한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소통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부 후원으로 중·일 간, 한·일 간 역사연구자 교류모임이 열렸으나, 한·중·일을 모두 아우르는 모임이 아직 없는 현실에 비춰볼 때, '포럼'의 의미는 그만큼 더 크다. 주요 사업으로 해마다 11월 첫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국제회의를 연다. 올해에는 아홉 번째 회의가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주최하여 열릴 예정이다. '포럼'은 출발 때부터 각자가 속한 국가를 대표하지 않고 도시를 대표해 참석한다고 정했다. 타이완 학자가 참여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경을 넘는 민간의 학술 교류, 말하자면 국제 교류가 아닌 "민제(民際)" 교류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민간 연대운동의 약점은 단속성과 산발성인데, 이 모임은 재단 지원으로 지속성을 자랑한다. 그 성과를 가시적인 것 즉 출판물 등 양적 지표로 평가하자면 미약하나, 원래 취지대로 동아시아 역사학자의 소통 공간을 만든 점에서는 이미 평판을 얻고 있다. 특히 그간 축적한 운영위원들의 신뢰는 가장 큰 추동력이다. 그 덕에 2013년 11월 샹하이 회의에서는 영토분쟁을 우려하는 '공동선언문'도 발표할 수 있었다. 이해 관계와 학술문화가 다른 네 개 사회 대표들이 선언문 작성을 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조율하여 해낸 것이 지금도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 계획이라면 그때그때 현안을 공동 주제로 삼아 학술토론을 해온 것은 계속 해나가되, 그것 말고도 해마다 발생하는 각 사회의 역사분쟁을 정기적으로 리뷰하여 소통공간을 넓히는 사업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Q 2010년 서남통신에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이어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쓰셨다. 2016년 똑같은 질문을 드린다면? 특히 '중국 부상'이라는 현실 속에서 한·중 관계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백영서 얼마 전부터는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중국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를 묻자고 주장한다. 주어가 바뀐 것인데, 소극적으로 중국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가 중국에게 미칠 영향을 묻자는 뜻이다. 나는 한‧중 관계사를 개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으로 비대칭, 인근성, 한반도 위치와 역할의 중요성이란 조건을 들고, '변하는 것'으로 한‧중 관계를 형성하는 주체가 점차 다양해지고 상호 의존성이 점점 더 커져 온 조건과 한‧중 관계에 끼어드는 제3자로서 강대국 출현이라는 조건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한 적 있다. 여기서 동아시아의 역사 전환기마다 한반도 위치와 역할이 핵심 요소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멀리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재 북핵문제로 불거진 한반도 분단 문제가 동아시아 평화에서 관건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가 적극적으로 평화 체제를 만들면서 그에 상응한 내부 개혁을 해나갈 때 중국은 우리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행여 중국부상으로 조공질서 같은 것이 반복될까봐 우려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에서 나온 태도가 아니다. 한‧중 관계에서 다차원적으로 긴밀해지는 상호의존성과 제3자의 영향이라는 이 새로운 변화가 변하지 않는 조건과 얽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규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에 관한 내 생각이 더 궁금하다면 졸저 《핵심 현장에서 다시 보는 동아시아》(2013)를 보기 바란다.

Q 동아시아 인문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동아시아를 공부하는 신진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백영서 계속 큰 질문이 이어진다. 나는 학부생을 위한 과목인 '동아시아학입문'을 강의하면서 첫 주제로 '동아시아적감수성'을 잡는다. 그 강의 목적이 동아시아에 관한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있음을 강조하려는 뜻에서다. 동아시아에 관한 글을 읽고 쓰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거에 그곳에 살았던,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 입장을 이해하고 그것에 적절히 반응하는 감성능력(emotional literacy)을 키워 그들의 관점에서 상황이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방법을 배우고 여기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힘을 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 바탕은 동아시아의 언어, 문화, 역사를 힘써 익히는 것이다.

Q 초대 자문위원으로서 또 중국 근현대사 전문가로서 재단의 새로운 10년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시가?

백영서 출범 초기 자문위원회를 할 때 어떤 위원이 이렇게 우려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위원장을 맡았으니 한국사를 동아시아사 속에 해소시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우려는 고구려연구재단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재조직할 때부터 나온 반발과도 연관된 것이 아닌가 짐작하였다. 그때도 똑같이 답했지만, 동아시아담론을 주창한 내 일관된 입장은 '자국사와 동아시아사의 화해'다. 역사분쟁은 한국사의 관심만 강조한다 해서 해소될 것이 아니다. 국내 여론만 살피는 것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그러한 인식은 지난 10년간 재단이 견지해온 원칙이고 또 앞으로 새로운 10년 동에도 내내 밀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니겠는가. 특히 중국의 대국굴기와 더불어 지구적 시각에서 중국사를 해석하는 조류가 강해지는 요즈음 국제학계를 고려한다면, 우리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한국사를 해석해야 중국을 위시한 세계를 향한 설득력을 높여갈 수 있다.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다. 내가 한‧중 관계사를 다룰 때 중국이 우리에게 무엇이냐가 아니라 중국에게 우리가 무엇인가를 묻자는 취지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다양한 사업을 수행해오면서 양적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앞으로는 질적 성취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사업의 전략적 집중이 필요한데, 특히 연구 영역에서 사회의 요구를 고려하여 학술 의제를 선정해 그것을 중심으로 학계의 조류를 앞서 이끌어나가야 한다.

Q 재단은 국가와, 국민, 그리고 학계로부터 다양한 요구를 받고 있다. 특히 재단은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독자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지만, 어려운 점이 많다. 이후 재단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전망해주신다면?

백영서 이것은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다. 재단 초창기에 참여해본 사람으로서 느낀 것인데 출범부터 태생적 어려움이 있었다. 국책연구기관이다 보니 학술연구 기능과 정책 자문 기능에 교육홍보 기능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어 오랜 기간이 걸리는 연구 기능이 소홀해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재단의 리더쉽이 연임이 안 되는 조건에서 사업 방향이 일관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듯싶다. 이것은 구조적 제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견고한 구조적 제약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틈새는 있기 마련이고 행위자가 그 틈새를 찾아 구조를 서서히 바꿔가기도 하는 것은 구조와 행위 주체에 관한 사회학 이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 연구자라면 경험적으로 잘 안다. 인간은 역사의 제약을 받되 그 속에 갇힌 죄수나 포로는 아니지 않은가. 과거부터 형성된 구조의 제약 속에 살되 틈새를 활용해 행위 주체가 집단적 의지를 모아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역동하는 역사의 모습이다. 이렇게 볼 때, 재단의 태생적 제약 속에 근무하는 재단 구성원의 의지를 모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쉽지 않지만 이것 말고 다른 답이 있을 리 없다. 특히 재단 10년을 맞아 구성원이 함께 10년사를 쓴다는 자세로 10년의 성과와 한계를 치열하게 검토하고, 그러한 성찰에 기반 해 새로운 10년의 비전을 실천하는 보람찬 일에 나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