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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화해에 이르는 징검다리 - 한일 역사공동연구의 성찰과 기대 -
  •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역사화해에 이르는 징검다리 - 한일 역사공동연구의 성찰과 기대 -

 

 

왜 한일 역사공동연구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주도적 노력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의 적극적 대응으로 얼어붙었던 한일관계가 급속히 개선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우호 협력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역사화해를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를 악화시켜온 주요 원인이 역사문제를 둘러싼 충돌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화해야말로 한일관계 개선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역사화해란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을 종식하고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을 말한다. 역사화해의 최상 목표는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이 서로 적대와 불신을 해소하고 존중과 신뢰를 쌓아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역사화해에는 역사문제의 공동 연구와 상호 이해가 꼭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이미 두 번에 걸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한 바 있다. 필자는 한국과 일본이 지속적으로 관계를 개선해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경험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한일 정상의 합의에 따라 양국정부가 공식 지원해 운영한 한일관계사 공동연구 조직이다(12002.5~2005.5, 22007.6~2009.12). 그 역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한일관계사 쟁점을 한일 학자가 함께 연구, 토론하고 보고서를 보급함으로써 양국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개선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짧은 기간에 방대한 성과를 생산했다. 그런데도 한국과 일본에서는 파급 효과가 크지 않아 역사 갈등을 극복하는 데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많다. 그렇지만 역사공동연구는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통해 역사인식의 충돌·대립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요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한일의 역사갈등과 역사대화』(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4)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배경

  한국과 일본 정부가 역사공동연구위윈회를 출범시킨 배경에는 역사인식을 둘러싼 충돌이 있다.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맺은 이른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의 합법·불법, 정당·부당, 유효·무효 등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등을 빚어왔다. 역사인식의 충돌은 때때로 정치 · 외교 문제로 비화해 양국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 일본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한국사를 무시하고 왜곡한 사건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일본 정부는 그해 11월 교과서의 근대사 기술 검정에서 이웃나라의 역사인식을 배려하겠다는 근린제국(近隣諸國) 조항을 마련해 갈등을 수습했다. 그러나 20013월과 20053월 일본 정부가 식민지지배에 대해 한국의 역사인식과 정면 배치되게 기술한 중학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킴으로써 교과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상반된 역사인식은 식민지 지배로 야기된 과거사처리에서도 갈등을 빚었다. 양국 사이에서는 재한 피폭자, 사할린 잔류 한인, 일본군위안부’, 징용과 징병 피해자 등에 대한 사죄·반성·보상을 둘러싸고 외교 교섭은 물론 민간 자율의 운동과 소동 등이 전개됐다. 2000년 전후에도 상황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은 정부 요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독도 영유권 주장, 식민지 지배 미화 발언 등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대한 한국인의 불신은 강하고 깊어서 교류 협력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일본으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지속됐다.

 

  그런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발족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역사인식이 개선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국의 역사인식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1965년 이래 1980년대 말까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총리의 견해는 한일 간 불행한 시기에 유감을 표명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1993년 이후 총리는 식민지 지배로 인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일본 총리의 위와 같은 발언은 김영삼·호소카와 정상회담(1993.11.7.), 무라야마 총리 담화(1995.8.15), 김대중 · 오부치 공동선언(1998.10.8), 일본 간 총리 담화(2010.8.10)를 거치면서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로 자리 잡았다. 특히 총리 담화는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을 언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김대중 정부 때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인식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또 언급하겠다. 일본의 역사인식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태동케 한 배경에는 10여 년 이상 축적된 민간의 역사대화가 있다. 1980년대부터 한국의 역사교육연구회, 한일

문화교류기금, 한국교육개발원, 한일역사교과서연구회, 국제교과서연구소, 서울시립대학교, 한일관계사학회, 한일역사교육교류모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등은 일본의 죠에츠교육대학, 일한역사교과서연구회, 국제교육정보센터, 가쿠게이대학, 비교사 · 비교역사교육연구회, 일한역사교육교류모임 등과 역사인식을 둘러싼 발표와 토론을 거듭했다. 역사교과서 기술과 역사수업 등을 주로 화제로 삼았다. 한국과 일본의 민간 역사대화는 역사인식의 차이와 쟁점을 확인하고,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촉진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유사한 역사대화를 국내외로 확산하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연구자와 교육자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역사대화의 노하우를 축적했으며, 역사공통교재를 발간했다. 민간의 역사대화는 매스컴 등을 통해 정부와 사회에도 알려져 관심을 촉발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런 전사(前史)가 있었기에 양국 정부가 지원하는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계기

- 김대중 · 오부치 공동선언(1998.10)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때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와 함께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출범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공동선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하였다. 또한 양국 정상은 양국 국민, 특히 젊은 세대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견해를 함께 하고, 이를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하게 반성·사죄하고, 한국이 수용·평가하며, 두 나라는 우호·협력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서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됨으로써 공동연구의 시작도 탄력을 받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동선언의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는 한국과 일본이 상대국의 노력과 발전을 존중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교류와 이해를 발전시키기로 결의한 점이다. 다음의 구절을 주목하기 바란다.

  양국 정상은 과거 오랜 역사를 통하여 교류와 협력을 유지해온 한·일 양국이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각 분야에서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왔으며, 이러한 협력관계가 서로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한국이 국민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비약적인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하고, 번영되고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데 대해 경의를 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하에서 전수 방위및 비핵 3원칙을 비롯한 안전보장정책과 세계경제 및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 지원 등을 통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 온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양국 정상은 한·일 양국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이념에 입각한 협력관계를 양국 국민 간 광범위한 교류와 상호 이해에 기초해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나가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한일의 역사화해는 함께 갈고 닦으며 성취한 역사를 존중하고 계승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양국 정상이 건전한 역사인식의 수립에 남다른 용기와 결단을 보임으로써 역사공동연구위원회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대한 평가 평가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실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아시아역사자료센터를 개관하고 한국과의 역사대화를 지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96년 한일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일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1997~1999)와 한일역사가회의(2001~2023)를 운영했다. 이들 위원회가 곧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발족의 토대가 됐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정상회담(2001.10)에서 한일관계사 공동연구를 합의함에 따라 한일역사공동연구추진계획지원위원회를 설치했다(2002.3). 지원위원회는 역사공동연구뿐만 아니라 역사가회의, 각종 학술교류, 한일신세기교류프로그램, 한일평화우호교류계획 등도 지원할 예정이었다. 지원위원회는 연 1~2회 정기 회의를 열어 역사공동연구의 목적과 방향 등을 논의했다. 지원위원 한일 양국에서 각각 6명을 위촉했다. 필자도 그 일원이었다.

  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위원장 각 1인 외 연구위원 각각 10(고대사 3, 중근세사 3, 근현대사 4)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3년에 걸쳐 19개 주제에 관한 연구와 토론을 진행해 6권의 보고서를 간행했다. 한일 월드컵 공동 주최(2002)와 일본의 한류 붐 등으로 상호관계는 비교적 양호했다. 그러나 곧 한일관계는 급전직하로 악화됐다. 고이즈미 총리는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 정부는 중학교 교과서 검정에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다시 통과시키고(2005.3),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조례를 제정했다(2005.2).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관계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2005.3). 양국 정상은 역사 갈등을 완화하는 수단으로서 역사공동연구의 재개를 합의했다(2005.6).

  한국과 일본은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추진 계획합의문을 교환했다(2005.10.27). 주요 내용은 한일관계사 중학설과 해석에 차이가 나는 분야에 대한 공동 조사와 연구를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도출하고 상호 이해와 인식을 심화한다는 것이었다. 또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연구성과를 지원위원회에 제출해 양국 정부, 관련 기관 및 개인에 배포하고, 교과서 편수에도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각각 위원장 1명 외 연구위원 16(고대사 3, 중근세사 3, 근현대사 4, 교과서위원회 6)으로 구성하고 3년에 걸쳐 24개 주제를 연구 · 토론해, 7권의 보고서를 간행했다.

  두 번에 걸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한일관계에 관한 연구의 심화, 차이점과 공통점의 도출, 연구 인력의 양성과 역량의 축적, 인적 교류 네트워크의 형성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특히 교육부가 사무국을 따로 설치해 전폭 지원한 한국 쪽은 정식 보고서 이외에 많은 연구서와 자료집 등을 간행해 많은 결과를 쌓았다.

또 하나 중요한 성과는 한국과 일본의 대외 신인도(信認度)를 높였다는 점이다. 세계 여러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하는 나라로 보았다. 역사공동연구는 두 나라가 역사문제의 극복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인상을 세계에 과시함으로써 인식도와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 점은 보통 간과하기 쉬운데,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공동연구에는 수정 및 보완할 점도 많다. 먼저 연구의 진전 상황을 공개하지 않은 데다 연구 성과가 방만해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별로 얻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인 셈이었다. 또 역사공동연구가 마무리될 즈음 양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역사 대립이 오히려 격화돼 역 사공동연구의 필요성이나 효용성을 떨어뜨리는 사태를 맞이했다. 정치가 역사를 압도하는 현상이 되풀이된 것이다. 역사공동연구의 방법과 목적에도 보완할 점이 있다. 양국에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자료집을 만든다거나, 교과서나 개설서 집필에 참조할 수 있는 권고안을 채택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역사공동연구를 역사화해의 징검다리로 삼기를

  한일 역사공동연구는 역사 갈등을 완화하고 치유하는 장치로써 활용할 수 있다. 또 역사화해를 이루는 데 거쳐야 할 의례로서도 아주 요긴하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이런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위원의 구성 및 인선, 운용을 개선해 지속적으로 가동할 필요가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70년 이상, 독일과 폴란드는 50년 이상 역사대화를 계속해 오늘날 유럽공동체를 형성했다. 이에 비해 210년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걸음마 단계에서 멈췄다고 볼 수 있다.

  한일관계가 극적으로 개선의 방향으로 나가는 지금이야말로 역사공동연구를 재개할 시점이다. 한국과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번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역사인식의 상호 접근과 이해가 필수 불가결하다. 이런 우호적 분위기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재개는 투입하는 비용에 비해 거두는 효과가 훨씬 큰 가성비 높은 사업이다. 윤석열 정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의 분발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5, 1 - 6.

•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9, 1 - 7.

• 『한일의 역사갈등과 역사대화, 정재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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