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의 〈일제침탈사 편찬사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 지배 실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종합하여 총서로 발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자료총서, 연구총서, 교양총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로 나누어 학계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일제침탈사 시리즈〉에서는 발간된 일제침탈사 총서 가운데 한 권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1919년 시흥공립보통학교 7회 졸업식 사진(사진 제공: 박건호 소장)
근대 초등교육의 시작
제국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던 19세기, 교육 부문에서 우리의 과제는 근대 국민교육 체제를 마련하고, 그에 근거하여 학교를 확장해가며 보통교육, 평등교육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흥학(興學) 정책과 조선인의 민족의식, 흥학 정신에 따라 전국에 많은 공·사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에는 선교사들이 주도해 설립한 종교계 학교를 비롯해, 개인이 재산을 출연해 세운 학교도 있었고 지역민들이 공동으로 재원을 마련해 설립한 공립형 민립학교도 있었다. 이들 사립학교는 통감부가 주도한 공립보통학교에 맞서 신교육 보급과 민족의식 고취의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
초등교육체제의 근본, 공공성
근대개혁기 관민이 협조 호응하여 수립하고자 했던 초등교육 체제는 교육 목적 면에서도, 학교의 설립과 운영 면에서도 강한 공공성을 띠고 있었다. 본래 개인이 학교를 세우거나 교육을 받는 목적은 사회적 위신, 학구열, 출세욕 등 사적 측면과 국가와 민족, 사회를 위한다는 공적 측면을 동시에 갖기 마련이다. 특히 국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1906년 이후에는 학생으로서 근대교육을 받는 것, 교원으로서 근대교육에 종사하는 것, 학교 설립에 동참하는 것 모두가 자기 발전, 자아실현이자, 교육구국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등교육의 굴절과 왜곡
일제 강점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교육의 목적은 일본어를 잘하고 성실 근면하게 노동에 종사하는 “충량한 신민 육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일제 말까지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초등교육은 예비교육이 아니라 완결교육으로 행해졌다. 일본어가 필수 과목이 되어 교육과정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했거나 검정 또는 인가를 받은 교과용 도서만 교과서로 허용되었다. 조선어 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기술되었다. 모든 보통학교에는 최소 1명 이상의 일본인 교원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실업교육·직업교육·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학교 차원에서 농업을 경영하게 하고, 여기에 교원과 학생의 노동력을 동원했다. 사립학교는 요구사항을 갖추어 인가를 받아야만 정규학교가 될 수 있었다. 사설 학술강습회와 서당은 부족한 보통학교의 보완책으로 보존하되, 통제는 하면서 지원은 하지 않았다. 또한 ‘수익자 부담’을 원칙으로 하여 초등학교 설립·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해당 지역의 조선인이 직접 부담하게 하였다.
조선인의 공립보통학교 전유와 그 한계
조선인은 강점 초기에는 보통학교 취학 거부로 맞섰다. 거부에서 취학으로 대응을 바꾼 후부터는 교육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비판과 저항,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교·학급 증설 운동은 초등교육 확대를 요구하며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에 맞선 것이지만, 동시에 조선총독부의 공립보통학교 체제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일본인 교원의 높은 봉급을 부담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정해놓은 교육과정에 따라 일본어로 공부하고, 일본 축제일에 일본 천황에게 경배하는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 체제였다. 조선인이 자발적·적극적으로 이 체제 안에 들어가려 했던 것은 문맹 탈출, 일본어 습득, 사무직 취직 등 공립보통학교를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이자, 새로운 삶의 기회를 모색하는 데 필요한 발판으로 전유(專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교육에서 사적 측면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공공성의 실종
학교 설립과 경영에 들어가는 경비를 조선인에게 떠맡긴 수요자 부담 원칙은 교육의 공공성 상실을 가속화했다. 학교 부족으로 치열한 입학 경쟁을 해야 하고, 입학 후에도 수업료 부담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 먼 등하굣길을 오가며 외국어인 일본어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일본인 교원의 차별적·폭력적 언행을 견뎌야 하는 등 졸업할 때까지 악전고투해야 하는 상황은 자신이 받은 교육의 효과를 사회가 나누어 누려야 한다는 인식을 희미하게 했다. 또한 수요자 부담 교육은 조선사회의 경제난, 남성 중심적 가부장 질서와 결합하여 절대다수의 여성을 초등교육에서 소외시켰다.
다시, 초등교육의 과제를 성찰할 시간
1945년 8월 15일 이후, 교육 부문에서 우리의 과제는 교육정책에서 공공성을 회복하고 교육이 사회의 공공재란 인식을 기본가치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었다. 보통교육, 평등교육 실현이라는 19세기의 교육 과제를 무상의무 교육이라는 제도적 차원에서만 할 것은 아니었다. 가족의 형태와 경제적 형편, 거주지, 성(性), 장애 등 학생이 처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조건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교육의 내용과 실질을 실현해 나가야 했다. 해방 100주년이 사반세기 앞으로 다가온 지금,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성찰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정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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