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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아나톨리 김과 “푸른 섬” 사할린
  • 문준일 원광대학교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



언론의 조명을 받은 성공한 고려인 작가

    

한국계 러시아 작가 아나톨리 김은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민족 축전에 참가하면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이후 한국의 대학교에서 재직하면서 자신의 역사적 조국에 대한 이해와 한국어 습득의 기회를 얻었다.

아나톨리 김은 사할린의 방랑자들(1987), 연꽃(1988), 페자의 통나무집(1993), 다람쥐(1993), 아버지 숲(1994) 등 작품을 한국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하지만 한국 독자들에게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여러 차례 문학상을 수상한 문학계의 주도적 인물이자, 세계 20여 개 언어로 작품이 번역된 세계적인 작가다. 하지만 우리가 피상적으로 대하는 먼 이국에 있는 교포의 성공담 이면에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 녹아 있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인생을 관통한 디아스포라라는 운명의 사슬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존재론적 고뇌가 아로 새겨져 있다.

        

한국계 러시아 작가, 그 이중적 운명

    

이제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써보자. 아나톨리 안드레예비치 김이 그의 풀네임이다. 풀네임의 의미는 안드레이의 아들로 이름은 아나톨리이고, 성은 김씨라는 뜻이다. 러시아의 미들 네임은 부칭(父稱)으로 불리며, 아버지의 이름에서 만들어져 누구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아나톨리 김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아버지와 작가는 모두 러시아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가 한국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은 이라는 성씨뿐이다. 그의 이름을 통해 볼 때 핏줄이라는 유전적 형질보다 러시아라는 문화적 형질이 더 우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만들어낸 한편의 드라마다. 1906년 땅을 잃은 작가의 할아버지는 아내와 두 아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국경을 넘어 만주를 거쳐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새로 아내를 맞아 3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이 아나톨리 김의 아버지인 안드레이다.

1918년 할아버지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고향에 남겨진 할아버지의 아내와 아들의 처지를 보다 못한 동생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동생의 설득과 러시아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던 할아버지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형을 고향에 데려가려고 왔던 동생은 한국에 있는 자기 가족을 포기하고 어린 세 조카를 키우게 된다. 10년 후 조카들이 장성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 국경으로 간 숙부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작가는 자신의 글에서 숙부가 아마도 중국 국경에서 붙잡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1937년 또 한 번의 비극이 작가의 가족을 덮친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인을 스파이로 이용할 것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극동지방의 한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렇게 아나톨리 김의 아버지는 카자흐스탄에 정착하였다. 1939년 아나톨리 김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다. 강제이주라는 고려인 전체의 비극이 그의 출생의 배경이 된 것이다.

극동지방에서 태어난 작가의 아버지는 현지의 삶에 적응하여 콤소몰(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하고 고등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러시아어 교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작가는 극동의 캄차카, 우수리스크 지역 등 러시아 각지를 전전하였다. 1947년 처음 사할린에 오게 되었으며 1956년까지 살았다.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가를 꿈꾸며 모스크바에 있는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졸업을 1년여 남겨두고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군 복무를 마치고 크레인 기사, 보일러공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삶을 영위하다가 1971년 고리키 문학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화가가 화폭 안에서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을 언어예술을 통해서 소설 속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를 꿈꾸던 그는 이내 자신의 존재론적 모순 앞에 고뇌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로 작품을 써야하는 러시아 작가와 순수 한국인 혈통의 소수민족 청년 사이의 간극은 매우 컸다. “러시아인이면서 한국인이었고, 또 러시아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었던정체성의 혼란은 그가 민족을 넘는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드디어 그는 1976년 작품집 푸른 섬으로 데뷔하였다. 이 작품집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사할린을 주 배경으로 하는 단편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아나톨리 김(2005년 자신의 별장에서, 필자 촬영)

    

사할린, 가라후토, 한민족 비극의 땅

    

사할린의 운명은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1855년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화친조약인 시모다(下田) 조약을 맺는데 이때 사할린이 어느 쪽 소유인지 확정하지 않았다. 이후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모다조약을 개정하면서 사할린섬이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남사할린은 일본이 지배하에 들어간다. 남사할린을 차지한 일본은 개발을 위해 가라후토청(樺太)을 세우고 한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한다. 1945년까지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한인은 약 5만 명에 이르는데 대부분 탄광에서 일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에 시작되었다. 패전의 결과 남사할린은 소련에게 다시 귀속되었다. 일본은 사할린에서 철수하면서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인들을 두고 떠나버렸다. 일본이 떠나간 빈 공간을 메우고 들어온 소련도, 해방정국에서 혼란스러웠던 조국도 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그들은 고향으로 데려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 배는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그 땅에서 또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사할린에 징용된 한인들



사할린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 한인희생자위령탑

 


절망의 섬에서 희망의 섬으로

    

아나톨리 김은 자신의 작품에서 소련의 아시아 지역과 극동 지방의 광활한 공간에 내던져진 한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세밀히 묘사하였다. 그는 일본의 사할린 점령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 한명이다. 자전적 소설인 나의 지난날(1998)에는 사할린 시절 아나톨리 김이 살았던 마을이 자세히 묘사되어있다.

마을의 거리는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였고 길 양옆으로 악취가 나는 더러운 물이 흐르는 도랑이 패여 있었다. 커다란 쥐들이 이 도랑에 태연히 앉아있었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세상에서 동떨어진 변방의 빈궁하고 무질서하고 우울한 삶의 흔적들이 눈길을 끌었다.

사할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첫 작품집 푸른 섬에서 작가는 사할린에 자신만의 문학적 형상을 입힌다. 체홉에게 사할린은 절망의 섬이었다. 그가 쓴 여행기 사할린 섬에서 사할린은 유형지였고, 회색빛으로 물든 암울하고 혹독한 추위와 안개의 땅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곳은 잠시 빌려서 살고 있을 뿐인 땅이었다. 하지만 아나톨리 김에게서 사할린은 다양한 색채로 표현되는 그리움의 소중한 장소이며 극동의 자연이 주는 시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한다.

푸른 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할린에서 겪어내는 운명은 비극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통해 그들에게 숨겨져 있는 영혼의 형질을 밝혀내고 있다.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은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삶 자체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또한 푸른 섬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민족들과 인종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당연한 일로, 사할린에는 제정 러시아 시기 다양한 국적의 죄수와 인종이 유입되었고, 일본이 남사할린을 점령한 후에는 한인들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극동 지역에서도 지속적으로 다양한 민족의 이주가 있었다. 한마디로 사할린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혼종되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아나톨리 김의 작품에서 민족 간의 갈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주 가끔 한인과 일본인의 갈등이 보일 뿐이다.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사할린은 유형과 이동의 땅이었으나 어느덧 고향으로 변해있었다. 푸른 섬에 수록된 매자나무의 주인공 그리네비치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돌아오면, 사할린의 해안가에 위치한 회색빛 마을의 오래된 아버지의 집은 그를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푸른 섬에 수록된 사할린의 방랑자들첫 부분을 인용해 보자.

    

러시아 아이들과 한인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있구만요? 역시 지금은 이렇게 섞어서 가르치는 게 좋겠지요? , 그렇게 하는 게 좋고 말고요. (...) 여기 사할린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고향땅은 바다 건너 저 먼 곳에 있으니까요. 모두가 각자 행복을 찾아서 여기에 온 것이지요.”

    

이렇게 아나톨리 김의 사할린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혼종이 가능한 모두의 고향이 되었고, “푸른 섬사할린은 유토피아이자 평온한 환상의 장소가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두 개의 운명과 두 개의 삶을 살았던 아나톨리 김이 디아스포라로서의 존재론적 고뇌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아나톨리 김의 첫 작품집 『푸른 섬』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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