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의<일제침탈사 편찬사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 지배 실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종합하여 총서로 발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자료총서, 연구총서, 교양총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로 나누어 학계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왜곡된 종교의 본질
일반적으로 종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를 일컫는다. 이에 비해 일제강점기의 종교는 천황제 국가의 지배 공간에 놓여 있었다. 즉 종교는 정권에 의해서만,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서만 보호받을 수 있으며, 정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국가본위’의 종교관을 의미하고 있다.
일본의 종교 개념은 메이지(1868~1912) 시기에 정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는 종교의 본질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요소를 우선시하는 범주화 현상과 종교 범위가 교파신도, 불교, 기독교로 국한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나 교파신도는 종교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그 외의 신앙단체나 민간신앙은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종교가 비과학적·사적 영역으로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과 함께, 일본 국체(国体)의 규범에서 일탈하지 않는 한에서 승인되면서 종교 개념은 정치적(political) 차원을 갖게 되고, 개별 종교들은 국가주의에 호응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일제의 종교 정책은 천황제 국가의 국체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2년 3월 신도 중심으로 유지해오던 종교 정책을 바꾸어 신도, 불교, 민간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를 교도직에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국민교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교부성(敎府省)을 설치하였다. 이는 일본이라는 가족국가의 번성에만 양심적으로 헌신하는 새로운 신민(臣民)으로서의 인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이른바 ‘삼조(三條)의 교칙(敎則)’을 하달하였다. 문제는 이 교칙은 천황제 국가에서 종교가 지향해야 할 목적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모든 종교는 오직 국가의 지배에 충실한 복종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존립할 수 있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포교규칙과 종교의 구분
일제강점기 종교 인식은 1910년 8월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이후 그대로 적용, 확대되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신도를 비롯하여 기독교, 불교 등 3개 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고, 조선에서 자생한 종교는 이른바 ‘단속(取締)’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천도교, 시천교, 대종교, 대동교, 태극교, 공자교 등 그 종류가 너무 많고 잡다할 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도 정치와 종교를 서로 혼돈하여 순연히 종교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그 단속이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일제는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로 구분하고 1915년 8월 ‘포교규칙’을 제정하였다.
포교규칙으로 모든 종교의 포교행위는 총독의 철저한 감독과 감시 아래 가능하였으며, 심지어는 교회당의 폐쇄를 포함한 금지조치를 내릴 수 있고 포교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는 포교규칙이라는 법규를 통해 모든 종교의 행위를 행정기구 즉 조선총독부를 통해 감시 감독하며 통제하려는 것이다.
일제는 이러한 ‘포교규칙’ 외에도 ‘종교 선포에 관한 규칙’(1906), ‘각 지방 사찰의 소유재산 보호에 관한 건’,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 ‘사찰 보물 목록첩 조제(調製) 건’, ‘사찰 주지 취직인가에 따른 취급 방법 건’, ‘조선사찰 재산관리에 관한 건’, ‘신사사원규칙’, ‘축제일 당일 사립종교학교 거식(擧式) 예배에 관한 건’, ‘사립학교 성서교수(聖書敎授)에 관한 건’, ‘신사규칙’, ‘사원규칙’, ‘보안법’, ‘사립학교령’, ‘집회 취체령’, ‘범죄즉결례’와 ‘범죄즉결례 시행수속’,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규칙’ 등 각종 법령과 규칙으로 식민지 조선의 종교를 관리하였다.
종교의 분열과 동원하기
일제는 종교의 분열과 일제 협력을 위한 동원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일제는 종교를 정치와 교육으로부터 분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를 분열시키는 데도 적극 관여하였다. 불교의 경우 전통의 조선불교를 일제 지배정책에 협력하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30본산 제도를 만들어서 한용운과 백용성을 중심으로한 항일불교로부터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일본불교 조동종과 조선불교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적극 추진하였다.
기독교는 선교사 중심의 서구 기독교로부터 분열시키기 위해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선교사 중심의 기독교를 적극 육성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분열 공작은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식민지 기독교의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전시체제기에는 신사참배를 둘러싸고 기독교의 친일화에 동원되었다.
유교는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을 조직함으로써 분열을 도모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친일유교에 이어 황도유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천도교는 일찍이 한말부터 친일화를 도모하였고 그 결과 천도교와 시천교로 분열되었으며,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삼성무극교, 제우교 등을 조직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특히 전시체제기에는 일제의 동원체제에 의해 식민지배체제에 협력하는 종교가 되었다.
식민성 종교정책
일제는 식민지적 종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일제의 종교정책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종무행정 조직과 그 변화, 그리고 종교 단속을 담당한 경찰 조직과 그 변화이다. 통감부 시기에는 경성에 통감부, 각 지방에 이사청을 두어 종무행정을 취급하고, 동시에 경찰 조직이 종교 단속 업무를 취급하였다. 통감부에서는 주로 지방부, 이사청에서는 주로 지방계, 경찰 조직에서는 주로 행정경찰계가 종교 상황을 다루었다. 조선총독부 시기에는 내무부 지방국 지방과(地方課),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비밀계(機密係), 각 도의 내무부 학무계(學務界)에서 종무행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조직 개편에 따라 달라지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에 학무국과 경무국 등을 신설하여 종무행정을 담당하였다. 학무국은 신도, 불교, 기독교를, 경무국은 이른바 종교유사단체 즉 민족종교를 관장하였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종교 정책은 일본 내의 종교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강점 이후 식민지 통치 과정에서 일본 내지보다 더 구체적인 법령을 만들었고, 이를 일본 내지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 종교 정책은 단순한 종교를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종교 정책을 정립하는 실험장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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