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시기 비석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공동 학술회의 개최
2022년 7월 6일 수요일,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의 나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원나라의 통치전략 연구”를 주제로 한·몽 공동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학술회의는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과 몽골의 몽골과학아카데미가 2007년부터 공동 주관으로 개최해 오고 있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한·몽 공동 학술회의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양국 연구자들의 학문적 열정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민속학연구소 회의실에서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양국 학자들은 서로에게 신선한 지적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난 아시아 역사 서술의 새로운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체렝도르지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민속학연구소 소장은 개회사에서 재단과 몽골과학아카데미 간의 공동 학술사업을 지난 3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몽 양국 학술교류의 가장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았다. 특히 매년 한국과 몽골을 번갈아 가며 개최한 한·몽 공동 학술회의를 통해 양국의 역사 연구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더 나아가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고 수준도 높아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재단 이영호 이사장은 환영사에서 먼저 원나라에 대한 기존 연구가 중국 중심적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이번 학술회의가 탈(脫)중국적인 시각에서 원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과연 몽골 제국은 분열되었을까?
촐몬 몽골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은 금장 칸국(Golden Horde)과 원나라 사이의 정치·경제·문화적 관계를 고찰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몽골 제국은 14세기 후반까지 금장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이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병존하는 연방국가의 형태로 통합성을 유지했다고 한다.
즉, 몽골 제국은 1260년 이후 분열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통합된 국가형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엥흐체첵 몽골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은 차가타이 칸국과 원나라의 관계를 논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의 두와 세첸 칸은 1304년 몽골 제국을 연방국가의 형태로 복원하고, 제국 내 교역과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은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4세기 전기 차가타이 칸국의 주화에는 불교의 주요 상징물인 금강저와 만다라 문양이 많이 나타는데, 이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주들이 원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체렝도르지 소장과 이영호 이사장
몽골의 전통을 계승한 원나라
심호성 재단 연구위원은 몽골 제국이 중국에 남긴 대표적인 정치적 유산인 원나라의 행성(行省) 제도에 대해 고찰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과 행중서성(行中書省)이 중국식 제도를 모방하였다고 보았는데, 자료분석 결과 몽골 제국의 지배층은 중국 정복 이전부터 존재한 정치제도를 중국 통치에도 적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자료에 기록된 “중서령(中書令)·좌승상(左丞相)·우승상(右丞相)” 등의 관직명은 사실 몽골어 “다로가치(darughachi)”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요컨대 원나라의 정치제도는 중국 전통의 제도를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 몽골 고유의 제도를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설배환 전남대학교 교수는 몽골 제국의 특징적인 사법제도라 할 수 있는 “자르고(jarghu)” 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몽골어 자르고는 “소송, 송사, 재판, 혹은 단사(斷事: 사건의 처결)”를 의미했고, 몽골 초원 지역에 오래도록 존재해왔던 소송·심판 제도를 지칭했다. 원나라의 약회(約會)는 몽골의 사법제도인 자르고의 일종으로, 몽골어 “볼자안(boljaan)” 혹은 “볼잘(boljal)”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자르고와 약회는 몽골인들이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 체계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몽골의 법률적 전통이 중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폰삭 몽골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은 원나라 군주들이 몽골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보존하고 이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극 시행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오랜 중국 지배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화와 관습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쿠빌라이를 위시한 원나라 군주들은 중국법으로 중국을 다스리고 몽골법으로 몽골을 다스리는 통치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몽골의 전통 관습을 온전히 유지했다. 이러한 면모는 “차간 사르(Tsaghaan Sar: 몽골의 설날),” 장례 의례, 그리고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 확인된다. 특히 중국 출신 귀족과 관리들은 몽골 초원에서 거행되는 장례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고, 몽골인들은 흉노 시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대칸의 유해를 땅속 깊은 곳에 매장하고 어떠한 비석이나 표지판도 세우지 않았다.
학술회의 참가자 단체사진
학술회의 전경
원나라 지배층이 통치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고명수 충남대학교 교수는 원나라의 대표적인 신분제도인 사등인제(四等人制)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근래에 후나다 요시유키(船田善之)를 위시한 몇몇 연구자들은 원나라의 사등인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비판하며, 원나라 정부가 피지배민을 “몽골인·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남인(南人)”의 4등급으로 구분한 것은 백성들을 등급에 따라 차별대우한 것이 아니라, 상이한 집단에 각기 다른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 문화와 풍속에 따라 속민들을 구분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고명수 교수는 다로가치의 임명, 관리의 추천, 음서(蔭敍) 등의 측면에서 색목인을 한인보다 높이 대우하는 원칙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요컨대 원나라에서는 몽골인·색목인과 한인·남인 사이에 엄격한 신분적 차이와 차별이 존재했으며, 원나라 지배층은 의도적으로 전자를 우대하고 후자를 차별했다.
김인희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 소장은 원나라가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의 편찬을 통해 스스로 중국 정통왕조임을 천명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북중국과 남중국 지역을 통합한 이후 쿠빌라이칸은 자신이 통치하는 원나라가 중국의 정통왕조임을 자부했다. 그러나 중국 지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중국인들로부터 원나라가 중국의 정통왕조임을 인정받아야 했다. 원나라 정부는 3사(三史), 즉 『송사』, 『요사』, 『금사』의 편찬을 통해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원나라 중기 이후 중국 전통의 화이관(華夷觀)이 와해되고 “화(華)”와 “이(夷)”가 모두 정통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관념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에 원나라 순제(順帝)는 송나라·요나라·금나라를 모두 정통으로 인정하는 3사의 편찬을 지시했고, “이적(夷狄)” 출신의 요나라와 금나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원나라도 정통왕조가 될 수 있었다.
몽골 게르에서 환담을 나누는 양국 학자들
카라코룸 답사와 몽골 게르에서의 하루
학술회의를 마치고 카라코룸 성터를 답사하였다. 카라코룸은 몽골 제국의 첫 번째 수도로, 울란바토르에서 서남쪽으로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이틀간 이어진 답사는 체렝도르지 소장이 직접 안내해 주었다. 체렝도르지 소장은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카라코룸 박물관, 에르데니 주 사원 등을 안내하고 몽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몽골 게르에서 숙박하였는데, 체렝도르지 소장은 몽골 전통음식인 허르헉을 준비해주었다. 허르헉은 자갈을 넣어 통째로 구운 양고기 요리로,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준비하는 요리라고 한다. 한·몽 양국 학자들은 밤이 깊도록 향후 학문적 교류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였다.
재단과 몽골과학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한 2022년 한·몽 공동 학술회의는 한국과 몽골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오랜만에 서로 만나 새로운 연구 성과를 공유한 뜻깊은 자리였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환대해준 몽골과학아카데미 소속 연구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함과 동시에, 내년에 한국에서 열릴 2023년 한·몽 공동 학술회의를 기약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국 참가자들에게 카라코룸 성터의 발굴에 대해 설명하는 체렝도르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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