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사
돈화를 가다
필자가 중국 길림성 돈화(敦化)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02년으로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이곳은 일반적인 여행지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산수가 뛰어나지도, 근사한 유원지나 대형 쇼핑몰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발해사 연구자에게는 충분히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발해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貞惠公主, 737~777)의 무덤이 발견된 곳이며, 발해 건국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돈화 발해 유적 지도
정혜공주 무덤의 발견, 발해 건국지를 확정하다
정혜공주의 무덤은 1949년 돈화시 남쪽 육정산에 있는 발해 초기 왕실 및 귀족 고분군에서 발견됐다. 굴식돌방무덤에 천정을 모줄임한 고구려 전통을 이은 이 무덤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혜공주의 묘비다. 묘비에는 발해와 관련한 여러 정보가 있는데, 예로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며, 발해가 황제 국가의 격을 갖춘 것을 보여주는 독자적인 연호와 황상(皇上) 등의 호칭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해 건국지를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내용이 나온다.
정혜공주는 777년 마흔의 나이에 사망하는데, 3년 뒤인 “보력 7년(780) 겨울 11월 24일 갑신에 진릉(珍陵) 서원(西原)에 배장(陪葬)”됐다. ‘진릉’이 대조영의 능인지, 무왕의 능인지는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공주가 ‘진릉’의 서쪽 언덕에 배장되었다는 것은 바로 육정산 고분군에 발해 초기 왕의 능묘가 조성됐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것은 돈화지역이 건국지이자 초기 도읍지가 있었던 곳임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졌다. 고구려의 옛 장수였던 대조영이 698년에 성을 쌓고 발해를 건국했던 동모산(東牟山)을 포함해 초기 도읍지를 구국(舊國)이라고 부른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는데,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굴되며 이러한 논란은 한때 사그라드는 듯했다.
육정산고분군 표지석(좌), 정혜공주 무덤(우)
육정산문화관광지구의 조성과 발해 역사 공간의 변용
육정산관광지구
발해 유적지를 빼고는 볼거리가 없던 돈화 지역이 들썩인 것은 10여 년 전부터이다. 육정산 고분군 일대를 포함해 52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범위가 문화관광지구로 개발됐는데, 2015년에는 중국 국가 공인 최고 등급인 5A급 관광경관 구역으로 지정됐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이러한 개발이 발해의 역사성을 훼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다. 실제 개발 전후 한국인 연구자의 접근을 차단한다든지, 관광지구 안에 설치된 시설물의 내용을 보면 그러한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포털 바이두 백과의 육정산문화관광지구에 대한 소개글을 보면, 육정산 고분군 입구 맞은편 산자락에 있는 정각사(正覺寺)는 중국 내 30여 개 사원의 정화(精華)로, 중요한 성지라고 한다. 그 뒷산에 세운 금정대불(金鼎大佛)은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고, 홍콩의 천단대불(天壇大佛)과 대응해 중화(中華)대지를 함께 보우하려는 의도에서 세웠다. 발해 초기 고분군이 있는 이곳을 중국의 ‘호국(護國)’ 성지로 삼은 것이다. 또한 중국은 발해를 만주족의 역사로 보는데, 청나라 시조와는 상관없는 이곳에 청조사(淸祖祠)를 세워 만주족의 발상지로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청조사 입구 쪽에는 백두산의 산신을 모시는 장백산 신사(長白山 神祠)를 세웠다. 만주족 역시 백두산을 신성하게 여긴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이곳에 신사를 세운 것은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한다. 즉 발해의 역사 공간을 고대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중국의 역사 공간이자 애국주의와 통일적다민족국가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현실 공간으로 변용시킨 것이다.
발해문화원 소개 안내판(좌), 장백산 신사 사진(우)
다시 불붙은 논쟁, 발해 건국지와 초기 왕성은 어디에…
최근 중국 학계에서 주목되는 점은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과 초기 도읍지를 연변조선족자치주 토문시의 마반촌산성과 그 인근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는 동모산성으로 여겨졌던 돈화 성산자산성의 경우 규모가 작고, 유력한 초기 왕성지로 꼽혔던 오동성과 영승유적은 발굴에서 발해시기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금나라 유적으로 판정된 것이다. 반면 마반촌산성은 발해 초기의 기와와 건물지가 발견됐고, 주변에 발해 유적이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에 한국 학계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기록에 나와 있는 동모산과 구국의 위치 차이가 나며, 해당 유적의 모든 문화층을 다 발굴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등이다. 어쨌든 돈화지역이 초기 도읍지가 아니라면, 육정산 고분군과 정혜공주 무덤의 의미는 달라지며, ‘진릉’을 비롯한 대조영과 무왕의 무덤 찾기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다. 향후 발해 건국지와 초기 왕성 논란이 어디로 향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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