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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태극기, 만국기 속에서 휘날리다
  • 목수현 근현대미술연구소 소장

조선의 문호 개방과 국기의 제정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겪은 뒤 조선은 일본과 이른바 강화도 조약을 맺었고, 이후 1882년부터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벨기에 등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됐다. 동아시아 내에서 중국과의 사대, 일본과의 교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만국과 교통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국기인 태극기는 이러한 과정에서 제정됐다.


조선에는 국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교룡기(交龍旗)’가 있었지만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는 없었다. 그런데 운요호 사건에서 나라를 표상하는 국기가 필요함을 알게 됐고 이후 논의를 거쳐 1882522일 미국과의 수교식에서 국기를 서로 교환했다. 조선은 국기의 제정에 대해 청의 리훙장(李鴻章)이나 외교관인 마젠중(馬建忠)에게 의견을 물었으며 이들은 청의 황제 상징과 마찬가지인 이 등장하는 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 측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수교 전날에 역관 이응준이 소매 속에서 꺼낸 도식을 보고 마젠중은 일본기와 비슷하다고 하며 흰 바탕에 푸른색 구름이 있고 가운데에는 붉은색 용이 있는 백저청운홍룡기(白低靑雲紅龍旗)’를 권했다. 김홍집은 이에 대해 조정에 가서 의논해야 한다고 했다. 정작 수교 시에 미국과 서로 교환한 것은 태극기였다. 조선의 국기 제정에 청이 관여하고자 했던 일은 흥미롭다. 리훙장이나 마젠중은 조선의 국기에 용을 넣음으로써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시각적으로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집과 조선 정부는 이러한 청의 의도를 간파했으며 청의 황제기나 일본기와는 다른 조선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태극과 사괘로 이루어진 형태를 국기로 선정하였다.


한미 수교 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 제독은 조선으로부터 받은 태극기 도식을 정부에 전했고, 이는 1882년에 미국 해군성이 발행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국기 모음 책에 수록됐다. 이 책에서 태극기는 Korea를 대표하며 다른 48개국의 국기와 함

께 나란히 소개했다.


이러한 태극기 도식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에도 전해졌다. 현재 미국 의회도서관, 영국 국립문서 보관소, 프랑스 국가기록원 등에는 조선과의 외교문서철에 태극기 도식이 보관되어 있다.

 


1882년 미국 해군성이 발행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

 

조선/대한제국의 표상 태극기

 

1882년 임오군란의 수습차 파견되었던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영국 영사 애스턴(Aston)과 메이지마루(明治丸)의 선장 제임스에게 국기를 보여줬고, 일본에 도착해서는 고베의 숙소 니시무라야(西村屋)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것이 일본에 태극기가 처음으로 소개된 일이었으며 1882104일 자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그 도식이 실리기도 했다. 박영효는 도쿄에 도착해 각국 공사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태극기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기를 연회장에 배치해 선보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1887년 미국에 공사를 파견했고 1889년에 워싱턴의 로건 서클에 공사관을 마련했다. 이 건물의 현관 입구에 태극기 모양을 설치하고, 옥상에도 태극기를 게양했다. 실내로 들어서면 객당 입구의 복도에 대형 태극기를 걸어 공사관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조선/대한제국의 표상을 알렸다. 이 건물은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 다시 매입한 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으로 개관해 한미 관계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조선이 처음 공식적으로 참여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장에도, 한국관을 지어 ‘KOREA’의 모습을 유럽에 알렸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장에도 태극기는 높이 걸렸다.



미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에 걸려 있던 초대형 태극기(헌팅턴 라이브러리 소장)


위기의 시기에 국민을 통합하다

 

국기는 이처럼 대외적인 필요에 따라 제정됐다. 국기의 제정을 1883127(음력)에 사도(四都)와 팔도(八道)에 널리 알리도록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국기의 존재가 그다지 빠르게 인식되었던 듯하지 않다. 태극기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1890년대 중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丘壇)으로 나아가는 고종의 행차 앞에 태극기가 빛났음은 독립신문18971022일자에서 보도했다. 각 기관의 정문에도 대형 태극기가 걸렸다. 고종의 탄신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이나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에도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태극기가 본격적으로 국민 통합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이후다. 전라도 구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고광순이 내건 태극기에는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국권의 회복을 기원하며 태극기를 내세웠던 것이다.

1909년에 있었던 순종의 서순행과 남순행에서도 태극기는 저항의 수단이 됐다. 통감부는 1907년에 새로 황제 위에 앉은 순종을 19091월과 2월에 걸쳐 개성, 정주, 평양, 신의주 등의 서북 지방과 대전, 대구, 부산, 마산 등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도록 했는데 이때 순종의 행차 양쪽에 국민들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들고 환영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의주의 학생들은 일장기를 들기를 거부하며 태극기만 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를 국기사건으로 크게 보도해 통감부와 순종을 배종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저항을 부추기기도 했다. 위로부터 제정된 국기가 국권 피탈의 위기에서는 아래에서부터 사용되면서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독립의 의지를 표출한 진관사 태극기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이후 국내에서는 태극기를 걸 수 없었다. 그러나 20095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태극기는 이러한 상황을 전복했음을 보여준다. 이 태극기는 태극기를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을 딛고, 일장기를 이용해 붉은 원에 흑색으로 태극의 음방을 그리고, 네 귀퉁이에 사괘를 그려 넣어 항일 의지를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이 태극기를 마치 보자기처럼 사용해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 신대한(新大韓), 독립신문5종의 독립신문류 19점으로 싸고 있었다. 이 신문들은 상하이나 국내의 지하운동 단체에서 발간한 것으로 191966일부터 12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태극기 또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태극기의 오른쪽 윗부분이 불에 타 손상된 점은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또한 함께 발견된 신문에는 태극 문양 및 태극기에 관한 기사도 있다. 기사에 따르면 태극기는 힘과 사랑을 토대로 사랑과 평등을 온 세상에 실현해나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태극기에 대한 이와 같은 의미 부여는 독립과 평화를 향한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진관사 태극기


해외 동포들을 하나로 묶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기로 채택한 태극기는 해외 동포들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는 중요한 회의나 예식을 할 때 태극기를 게양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매해 829일을 국치일로 삼고, 국권의 회복을 기원하는 행사를 치렀다. 행사장에 국기를 땅에 떨어뜨려 놓았다가, 국권 회복을 기원하는 연설과 노래를 부르며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진 뒤 늘어뜨렸던 국기를 줄로 당겨 다시 올리는 행사를 국기예식이라 칭하며 독립을 다짐했던 것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의 깃발도 태극기를 넣어 제작했다. 일본과 중국, 구미 등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에게 태극기는 민족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상징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에서는 19426월에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75호에 국기 양식을 제시했다. 흰색 바탕에 홍청(紅靑)의 태극을 중심으로 오른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건···리의 사괘가 배치되는 방식이었다. 깃대는 오른쪽에 두었다. 이 양식은 해방 이후 1949년에 국기 제작법이 정리될 때까지 쓰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마침내 대한민국의 국기가 되다

 

1945815일 광복이 되자 국민들은 모두 태극기를 꺼내들 수 있게 되었다. 중앙청에는 태극기가 높이 게양됐다. 1948510일 선거로 선출된 제헌국회는 당시 중앙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개원했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기 규정에 대한 통일안 마련을 지시했고 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에서 다섯 가지 안 가운데 우리국기보양회에서 제출한 안을 최종안으로 가결했다. 1882년 조선에서 국기로 제정된 지 140,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기로 채택된 지 74년이 된 태극기는 우리 근현대사의 영욕을 담고 있다.

 


임시정부 태극기제작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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