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산 유적에 설치되어 있는 발해 군왕 책봉 조형물
부여 왕성 길림 동단산유적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부여조는 부여의 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둥근 책을 성으로 삼고 궁실, 창고, 뇌옥 등이 있다.(以員柵爲城, 有宮室·倉庫·牢獄)’ 또,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 부여조는 ‘성책은 모두 둥글게 만들었는데 마치 감옥 같았다.(作城柵皆員, 有似牢獄)’라고 했다.
이 기록과 부합하는 성곽이 동단산 산성과 평지성이다.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로 구성된 형태이다. 동단산은 지면에서 50m 높이에 불과하지만, 평탄한 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청나라 때는 ‘악막성鄂漠城’, ‘이란무성伊蘭茂城’ 혹은 ‘일랍목성一拉木城’으로 불렸고, 해방 이후에는 ‘남성자고성南城子古城’으로 부르다가 최근에는 동단산 평지성으로 불린다. 동단산 산성과 평지성에 대한 발굴은 2000년대 들어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밀 발굴이 이루어졌다. 성 안에서 청동기 시대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 요금 시기의 유적이 모두 발견된다.
동단산 산성은 산 능선의 하단부터 상단까지 외성-중성-내성 세 겹으로 구축되어 있다. 성벽은 산의 경사면을 깎아낸 후, 그 위에 다시 흙과 화강암 잡석을 섞어 쌓았다. 외성의 경우 성벽 기저부의 양쪽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보축했다. 체성의 바깥쪽 면은 돌로 쌓은 석축으로 되어 있고, 안쪽은 흙으로 쌓은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문은 외성의 동쪽과 북쪽에 나 있는데, 동문에는 옹문시설이 남아 있다.
부여 왕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지성의 평면 형태는 불규칙 타원형이며, 전체 길이는 1,300m 내외이다. 성벽은 현재의 촌락이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흙을 쌓은 토축이다. 후대의 기와나 토기편들이 출토되어 여러 차례 재보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남북에 각각 하나씩 나 있고, 장대지將臺址는 남문과 북문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성벽 바깥쪽에는 해자垓子가 설치되어 있다.
최근 동단산 평지성 주변의 영안永安유적에서 대형 건물지가 발굴됐다. 유구 내에서 다량의 기와와 화문전花紋塼 등의 건축 자재가 출토되었는데, 와당의 경우 고구려, 발해, 요·금 시대와는 다른 것이어서 부여 와당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부여에도 기와 지붕을 한 건축물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모아산 고분군 18호 목곽묘 조사 및 복원 모습
부여 왕과 귀족의 무덤, 길림 모아산 고분군
동단산 부근에 거주하던 부여인들은 죽으면 모아산에 묻혔다. 모아산 고분군은 부여의 왕성인 동단산 평지성의 동쪽에 있다. 전체 면적은 15㎢로, 용담산・서산・모아산・남산 네 구역으로 나뉘어 대략 8,000여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부여의 장례 풍속은 후장구상厚葬久喪으로 대표된다. 기록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장례를 오래 지내는 것을 영화롭게 여겨 길게는 다섯 달에 걸쳐 진행했다고 한다. 상중에는 남녀 모두 흰 옷을 입었으며, 반지나 패물은 착용하지 않았다. 무덤은 주로 목곽木槨을 사용했고, 사람이나 동물을 함께 매장하는 순생殉牲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왕이 죽으면 옥갑을 사용하였다.
모아산 고분군에서 발굴된 부여 무덤은 대부분 목곽을 사용하고 있다. 구덩이를 얕게 판 목곽묘, 구덩이를 깊게 판 목곽묘, 구덩이가 깊고 묘광墓壙 테두리를 돌로 두른 목곽묘 등으로 구분된다. 모아산 고분군에서 규모가 가장 큰 18호 목곽묘는 현재 길림성박물원에 복원・전시되어 있다. 이 무덤에서 비단, 등자鐙子, 칠기,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그릇, 가죽 제품 등 당시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물품들이 출토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명품을 다 모아놓은 셈이니, 이 무덤의 주인은 부여 최고 지배층이었을 것이다. 부여의 왕이 사용했다는 옥갑玉匣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모아산 고분군 18호 목곽묘 조사 및 복원 모습
중국이 그리는 한나라식 부여
길림시를 방문할 때마다 부여의 역사가 조금씩 변형되거나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부여 유적으로 알려진 용담산 유적의 초입에는 각종 조형물이 설치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산성 내부에도 도교 사원과 유원지가 자리하고 있어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런데 조성된 조형물은 부여나 고구려 양식이 아니다. 중국은 공원 입구의 출입문과 내부 건물을 모두 한나라식으로 건축했다. 심지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조서를 받은 조형물을 세워서 부여, 고구려, 발해가 모두 중원 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왜곡해 선전하고 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졌지만, 과거 산성 출입구에 ‘고구려 사람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적힌 안내판을 세워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자국민들에게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임을 강조하고, 중국 내 조선족의 고구려 역사 계승 인식을 차단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현재 중국은 부여를 포함한 동북 지역의 고대 국가를 모두 속국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기원과 정체성을 중원의 고대 국가와 연결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 왜곡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 고대사 속에서 부여의 위상을 높이는 연구도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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