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한’에 살고 있지만 역사는 이곳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고구려, 발해, 부여, 옥저, 읍루와 같은 우리 민족의 역사는 북한과 만주 일대의 북방 지역에도 존재한다. 우리 역사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의 성장과 멸망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다양한 집단과 국가로 분리되었다. 그 중에는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실체를 파악하는 연구조차 제대로 없었던 우리의 역사가 있다. 바로 동해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와 부여 계통의 ‘옥저’, 그리고 발해의 기층을 이루었던 ‘말갈’은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역사’였다.
북방 지역은 역사 기록도 부족하고, 실제로 우리가 갈 수 없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북방 민족의 역사는 ‘변방’으로 치부되었고, 한국사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가 소외되어 왔다. 하지만 역사 자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고고학 연구 덕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다양한 자료를 발굴했고, 그 결과 북방의 여러 집단에 대한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렇게 문헌 자료가 부족한 경우 유일한 돌파구는 고고학 자료다. 고고학 발굴 자료는 역사 자료와 달리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으니, 역사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옥저와 읍루 같은 민족을 연구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고고학 자료는 우리가 쉽게 갈 수 없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에 필자는 지난 10여 년간 러시아와 중국을 조사·연구하여 얻은 옥저, 읍루에 대한 최신 자료를 통해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 책에 담았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박물관의 옥저 유물(농소 고분군 유물)
왜 옥저와 읍루인가
역사에서 잊혀진 옥저와 읍루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소외된 역사인 동북한 지역, 나아가 통일 이후의 우리 역사를 위한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함경도와 강원도는 한반도의 척추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을 따라 북한을 거쳐 북방 유라시아와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 교류의 중심이었다. 청동기 시대 이래 동북한은 한국과 유라시아를 잇는 고대 문화의 주요 루트였다. 이는 또한 유라시아 철도가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함경남북도를 거쳐 러시아의 국경 도시 하산을 통해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을 따라 이어지는 철도는 옥저, 읍루가 살던 지역을 지나간다. 2천 년 전부터 우리와 대륙을 이었던 옥저와 읍루의 이야기에는 이렇게 또 다른 의의가 있다.
옥저인이 남긴 연해주의 세형동검
중국사 중심을 탈피하는 우리의 역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 중심의 역사 해석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중국, 특히 중원 중심의 역사관이 대두되면서 그 해석과 효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에서는 ‘동북공정’이라는 단일 문제로 이슈화되었지만, 이는 사실 동북아의 역사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학자들에게 ‘동북아시아=중국’이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과는 별도로 존재했던 환동해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 문화의 흐름에서 강조점을 찾으면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할 수 있고, 새로운 시각에서 동북아를 바라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옥저와 읍루의 주요 무대는 현대 러시아의 극동 지역이다. 그동안 이 지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발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이전부터 한국사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옥저와 읍루가 증명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발해 위주의 조사가 대중적이고 정치적인 이해가 많이 작용한 것이라면, 이제는 옥저와 읍루라는 민족을 통해 발해를 넘어 북방으로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환동해 옥저, 읍루인들의 터전이었던 우수리강과 흑룡강의 합수 지점
북방민족의 역사: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반쪽
동북아의 역사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한국의 독자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중국은 중국 중심으로 동아시아 곳곳을 재해석한다. 국제적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우리가 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고대사 전공자의 비율을 보면 대부분 백제와 신라에 집중되어 있다. 최근 고구려나 발해 전공자도 많이 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하물며 옥저나 읍루, 부여와 같은 북방 민족의 역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옥저와 읍루가 역사에서 소외된 것은, 부지불식간에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선진적인 문화를 중국 쪽에서 찾는 전통적인 인식에서, 환동해 지역과 강원도는 변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민족은 옥저와 읍루뿐이 아니다.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삼강평원에서 거대한 성터와 집단을 이루었던 북방 지역의 두막루, 함경남도의 동예, 700년 넘게 나라를 이루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나라 부여, 강원도의 예맥과 말갈도 있다. 유독 북방에 소외된 민족과 나라가 많은 이유는 남한 위주의 역사관 때문이다. 더 깊게는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아픔, 러시아와 중국 같은 국가적 장벽도 큰 이유다. 남한이라는 틀을 넘어 유라시아와 조우하고 대륙과의 관계를 다시 논의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북방 역사인 옥저와 읍루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주변국과의 역사 갈등을 벗어 던지고, 거시적 관점과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북방으로 가는 관문을 다시 열며
전 세계가 코로나의 광풍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예전에는 쉽게 갈 수 있었던 연해주와 연변, 그곳에 옥저와 읍루의 유적·유물을 찾으러 갈 수 있을지 아직은 막연하다. 하지만 북방 지역으로 갈 날은 언젠가 다시 올 것이다. 남북한 철도가 개통되어 두만강을 따라 유라시아로 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통일된 유라시아 열차가 지나가는 동북한의 길이 바로 옥저와 읍루의 땅이다. 그런 점에서 옥저와 읍루의 역사는 잊혀진 고대사가 아니라 유라시아로 가는 길의 새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 북방사에 관심을 가진 젊고 새로운 연구자들이 유라시아로 가는 길고 긴 길을 떠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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