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휴,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특별연구원과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UBC) 방문학자를 지냈다. 현재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사회학부장을 맡은 바 있다.
단독 저서로는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월봉저작상 수상),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 지역의 독립운동』, 『현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숨은 주역』(세종도서 선정), 공동 저술로는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현대사적 성찰』 등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일 관계는 갈등과 대립의 측면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신임 대통령 하딩이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제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회의 개최를 제의하자 세계의 이목은 이에 쏠렸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침체와 내부 분열을 겪고 있던 구미위원부와 상해 임시정부는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수습하고 다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다. 워싱턴회의와 한국민족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학계가 관심을 가져왔으나 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민족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온 고정휴 교수로부터 한국민족운동의 판도와 진로를 바꾼 워싱턴회의(1921-22)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대담 | 서종진,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Q1. ‘워싱턴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제 질서의 기본 틀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워싱턴체제와 워싱턴회의의 배경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A1. 오늘 이야기하는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라 함은 1921년 11월 12일부터 이듬해 2월 6일까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열렸던 국제회의를 일컫습니다. 이때의 의제 가운데 하나가 해군 군축軍縮, 군비 축소 문제였기 때문에 ‘워싱턴 군축회의’로 부르기도 하지요. 당시 국내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서는 그 회의를 ‘태평양회의’라고 불렀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제반 문제들이 워싱턴회의에서 포괄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워싱턴체제(Washington Treaty System)는 워싱턴회의 결과로서 성립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제 질서를 말합니다. 이 체제는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 침략과 국제연맹 탈퇴로 파국을 맞이합니다. 그 후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지요.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국제 질서 수립에 있어서 주로 파리강화회의만 기억하는데, 이 회의에 오른 주요 의제는 전쟁의 발발지인 유럽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워싱턴회의가 따로 열려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문제들을 다루게 된 것이지요.
Q2. 그렇다면 워싱턴회의에 참가한 국가와 주요 의제는 무엇이었나요?
A2. 1921년 7월 중순 미국의 신임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의 제안으로 열린 워싱턴회의에는 미국을 비롯한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 등 9개국 대표단이 참여합니다. 이들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위치해 있거나, 또는 이 지역에 식민지를 보유하는 등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나라입니다. 주요 의제는 독일의 조차지租借地, leased territory였던 산둥반도를 포함한 중국 문제,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병과 영일동맹英日同盟, Anglo-Japanese Alliance 존폐 문제, 해군 군비 축소 문제 등이었습니다.
Q3. 워싱턴회의는 최초의 ‘군축’ 회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관련해서는 어떤 내용들이 결정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3. 글쎄요, 최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든 군축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해군 군비의 제한과 축소에 합의한 ‘5국조약五國條約, Treaty between Five Powers’이 그것입니다. 이에 따라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는 향후 1만 톤급 이상의 주력함을 5:5:3:1.75:1.75의 비율로 유지하기로 합니다. 열강 간 군함 건조 경쟁이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합의가 나왔던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1902년에 체결된 후 5년 단위로 연장되어 온 영일동맹을 폐기하기로 합의합니다. 그 대신 미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4국조약’이 체결됩니다. 그들은 태평양의 섬들에 대한 서로의 영유권을 존중하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공동회의에 부치며, 제3국의 침략에 대처할 조처들에 대해서도 상호 협의하기로 합니다. 서로의 기득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는 뜻이었지요.
세 번째는 중국에 관한 ‘9개국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19세기 말 이래 미국이 줄곧 주장해 왔던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을 워싱턴회의를 계기로 참가국 모두의 동의를 얻어 명문화시킨 것입니다. 이제 문호개방 정책은 미국의 일방적 선언이 아닌 조약으로의 효력을 갖게 됩니다. 이외에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산둥반도 반환 협정이 체결되고, 미국과 일본 간에는 시베리아 철병과 태평양상上의 전략적 요충지인 얍Yab 섬에 관한 양해각서가 교환됩니다.
Q4. 워싱턴회의의 결과로 워싱턴체제가 성립된 것인데, 그 역사적인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미일관계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A4. 아시아·태평양 질서는 러일전쟁 후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면서 흔들립니다. 청일전쟁 후 유럽에서 나온 ‘황화론黃禍論, Yellow Peril’이 힘을 얻게 되지요. 이리하여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일본 견제가 본격화되면서 미·일 충돌론이 공공연히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소강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연합국으로 참전한 일본이 독일의 조차지인 산둥반도를 점령한 데 이어서 당시 중국의 집권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21개조 요구’를 제시합니다. 유럽 열강이 전쟁에 돌입한 상황을 틈타 중국 본토와 만주·몽골 등지에서 일본의 권익을 획기적으로 키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미국은 이때 그들의 문호개방 정책에 반하는 협정을 중국과 체결하면 그것을 승인할 수 없다는 각서를 일본 측에 전달합니다. 이른바 불승인 정책입니다.
미국은 이러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회의를 제안했던 것이고, 일본은 마지못해 그 회의에 참석합니다. 어떻든 이 회의의 결과로 서방 열강과 일본은 동아시아·태평양에서 서로의 권익을 보장하는 가운데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미국의 하딩 대통령은 워싱턴회의가 끝나는 날 세계 평화를 위하여 외교상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자평합니다. 일본 내에서는 워싱턴회의의 결과에 대한 불만이 나왔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합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 시기 일본 외교의 기조는 ‘구미협조주의’였습니다. 이리하여 워싱턴체제가 성립된 것입니다.
한편, 1922년 1월부터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서는 워싱턴회의의 결과에 대해 “흡혈귀의 동맹의 이름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강도적 정책에 대하여 연대를 표명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열강 사이의 양보와 타협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파리강화회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지요.
우리 국민의 독립 열망을 호소한 청원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는
“한국의 독립이 실현되지 않으면 세계 평화는 기대할 수 없다.”며 각국 의회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한국 대표단(단장 이승만, 당시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를 보내 활동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Q5. 워싱턴회의와 한국과 관련하여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A5. 워싱턴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워싱턴DC에서 활동하던 구미위원부였습니다. 임시위원장이었던 서재필은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 워싱턴회의에 ‘한국의 생사’가 달렸다면서 총력을 기울여 이번 회의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후 임시정부는 국내와 만주·노령의 한인 사회에 사람을 보내 필요한 자금 모집과 시위 운동을 촉구하는 한편, 쑨원孫文이 이끄는 광둥廣東 정부에 특사를 파견하여 정치적인 승인과 차관을 요청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재정을 확보함으로써 워싱턴회의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때 광둥 정부는 내부적으로 취약한 상황이었기에 상해임시정부가 기대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합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한국 대표단’(The Korean Mission)이 만들어집니다. 그 구성원은 이승만(대표장), 서재필(대표), 정한경(서기), 돌프(Fred A. Dolph, 고문) 였고, 콜로라도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토마스(Charles S. Thomas)가 특별 법률고문의 자격으로 합류합니다. 이들은 하딩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1) 한국을 태평양의 일부로 간주할 것, (2) 한국을 피침략국으로 인정할 것, (3) 한국의 독립은 세계 평화 확보의 기초가 됨을 고려할 것, (4) 이상의 이유에 의해 한국 대표단의 워싱턴회의 참가를 허용하고 그들에게 발언권을 줄 것 등을 요구합니다.
미국 정부는 한국 대표단의 요청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미 국무부 극동국은 “한국은 현재 아무런 국제적 지위도 갖고 있지 못하며, 우리는 또 그 나라와 1905년 이래 어떠한 외교적 교섭도 없었다.”는 의견을 국무장관에게 제출하지요. 한편 일본 정부는 자국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할 때 워싱턴회의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조선 문제’가 제출되면 단호하게 배척하라는 훈령을 내립니다. 결국, 한국 대표단은 워싱턴회의에 출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를 의제로 올리려는 계획 또한 수포로 돌아갑니다.
Q6. 워싱턴회의가 한국민족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A6. 상해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는 워싱턴회의에 대해 총력외교를 펼쳤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심대한 타격을 받습니다. 회의가 끝난 직후 임시정부 내각은 정국을 수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 사직 의사를 밝힙니다. 구미위원부의 임시위원장 서재필도 사퇴하지요.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위상은 크게 흔들립니다. 이 사태는 결국 이승만에 대한 탄핵·면직 처분으로 연결됩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민족진영 내부의 좌·우 분화가 촉진됩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세계 개조와 민족자결주의 사조에 고무되었던 그들은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이리하여 그들 중 일부는 조선총독부가 내건 ‘문화 정치’ 테두리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확보하자는 민족개량주의로 기우는가 하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를 도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집니다.
Q7. 워싱턴회의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어떤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A7.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 보면 두 가지 문제가 늘 마음에 걸립니다. 국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입니다. 국가에 힘이 없거나 부족하면 국제 권력 정치에서 소외되거나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편, 민족이 이데올로기로 분열되면 국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한곳으로 모을 수 없습니다. 약소국의 경우에는 나라를 잃을 수도 있지요. 이념적으로 한곳에 쏠리면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는 오로지 미국에만 집중하다 낭패를 당했습니다. 사실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이 개최한 이 회의의 성패가 일본과의 협상에 달려 있는데, 그들이 스스로 한국 문제를 끼워 넣어 난처한 상황을 만들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인도·태평양이라는 말이 우리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이전에는 주로 환태평양 또는 아시아·태평양이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중국이냐 미국이냐? 여기에 이념 문제까지 가세하면 선택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냉철한 고민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반도는 대륙(아시아)과 해양(태평양)을 연결하는 가교입니다. 따라서 대륙 세력과도 소통해야 하고 해양 세력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비전 제시와 국민적 설득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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