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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 운동 100주년 다시보기
'용정 3·13운동'에 앞장선 한인 동포들
  • 장세윤(재단 운영기획실장)

1919 3 1일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나이, 신분, 성별을 뛰어넘어 전 계층이 참여한 이 운동은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확산되었다. 올해 새 연재코너 <다시 보는 3·1운동>에서는 100년 전 전국을 뒤흔들었던 3·1운동 가운데 많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3·1운동, 해외 교민사회에서도 큰 반향 일으켜

‘용정 3·13운동’에 앞장선 한인 동포들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오늘날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주는 의미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수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던 만주(중국 동북) 지역까지 확산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19 3 13(목요일, 음력 2 12), 북간도(현재의 중국 연변지역) 용정(龍井)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운동에는 최대 3만여 명의 많은 동포가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현재 연변 학계에서는 이를 ‘3·13반일시위운동또는 ‘3·13반일군중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 영사관 당국은 참여 군중을 6천여 명으로 축소하여 보고했지만, 중국 당국은 2만여 명의 많은 한인이 참가했다고 파악했다. 반면 계봉우(桂奉瑀)는 참가자가 3만 명을 넘었다고 보았다.


‘용정 3·13운동’에 앞장선 한인 동포들연변 3·13 운동 당시 현장에서 「독립선언 포고문」이 살포되었다. 이 포고문은간도거류 조선민족 일동명의로 작성되었다. 그런데 이때 김약연 등 17명의재남북만주(在南北滿洲) 조선 민족 대표명의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도 공표되었다. 김약연은 후일간도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연변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지사였다. 그런데 그를 중심으로 한 지역 유지들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상해(上海), 일본 동경(東京), 그리고 국내외 등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국제질서 재편의 새로운 기세를 감지하고 국내외를 망라한 거족적 독립운동을 준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3·13시위운동으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이들은 ‘3·13독립축하회바로 용정 3·13운동개최 이후 열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지원,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한 후 독립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략을 모색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3·13운동 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축하회를 개최했으므로, 이제는 독립정부를 세워야 하겠다, 그런데 그 정부의 형태는 전제군주제나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 정부여야 했다. 특히 임시정부와 같은 공화주의 정부여야 한다는 논리와 주장이 널리 전파,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용정(龍井) 3·13항일시위운동에 동참했던 학생과 군중들을 탄압한 중국 당국의 보고문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당국은 “3 13 6도구(六道溝) 2만여 군중 해산 이후 각현縣 각부()에 엄히 사찰, 금지하라는 급령을 내려 다시 많은 인원이 모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간민(墾民)들의 조수(潮水)와 같은 광열(狂熱)은 막을 수 없는 형세이다라고 한인들의 뜨거운 열기를 상부에 보고했다. 3 13일 정오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독립축하의 취지 설명이 끝나자,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군중은 기뻐서 흐느끼고(喜而泣), 흐느끼면서 뛰며(泣而蹈)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대단한 한인들의 지성(至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이 독립 후의 정부형태로 이미 망해버린 고국의 구 황제가 통치하는 형태의 정부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근거는 3·13 항일시위운동 현장에 뿌려진독립선언 포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용정 3·13운동’에 앞장선 한인 동포들현장 시위과정에서 17명 순국, 30명 넘게 부상잊혀진 의인들을 기억, 기념해야

안타깝게도 3·13운동 과정에서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지방관헌들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넘게 부상하는 큰 피해가 났다. 이날의 시위운동 때 앞장서 오장기(큰 깃발)를 든 공덕흡(孔德洽)을 비롯하여 현봉률(玄鳳律)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김종묵(金鍾) 4명이 제창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하여 모두 17명이 순국하는 참변이 벌어졌다. 이때 순국한의인들은 5천여 한인들의 애도 속에 용정 남쪽 허청리(현재 합성리)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현재는 ‘3·13반일의사릉으로 불리고 있다.


후일 3·13운동의 소식을 들은 재야 유생이자 사학자인 김정규(金鼎奎)는 그의 일기에 같은 전주 김씨로 부상을 입은 김진세(본명 김문헌)의 안타까운 형편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몸을 돌보지 않고 어려운 때에 뛰어든 것은 충렬자(忠烈者)가 감히 하는 의열(義烈)이며, 돈을 내어 액을 구하는 것은 친척이 마땅히 먼저 할 일이다. 지난봄 간도의 대한독립축하회 때 천사만난(千死萬難) 중 충의의 간담을 갖고 죽는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감히 앞장서 기()를 들고 항성(抗聲)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중략 어찌 장렬하지 않으리오. 오호라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많은 말이 소용없다. 김진세는 집이 원래 가난하여 끼니가 어렵다. 위로는 늙은 노친이 있고, 아래로는 어린애가 많다. 그 집의 생계가 모두 그의 한 몸에 달렸었고, 그 몸의 의지는 오직 다리에 있었는데, 한 다리를 잃었으니 여러 식구가 어찌하리오!”


 

참으로 참담한 사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처럼 어려운 처지를 무릅쓰고 살신성인의 희생을 치른 의인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추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늘에 주는 의미와 교훈을 깊이 새기며, 정의와 인도, 양심이 실현되는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