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동쪽 끝 설국, 사할린 그리고 사할린 한인
홋카이도 북쪽으로 길게 뻗은 섬 사할린. 길이는 한반도와 비슷하지만, 폭이 좁아 한반도 면적의 80% 정도인 이곳은 니히브족과 아이누족이 살던 곳이다. 1800년대 말 제정러시아의 동진과 이를 경계하는 청·일과의 관계 속에서 사할린섬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1945년까지 북위 50도를 기준으로 남사할린은 일본의 영토였다. 당시 화태, 혹은 가라후토라 불리던 이곳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동원 등의 이유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러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사할린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크게 북사할린에 거주했던 고려인들과 일본령인 가라후토로 이주한 한인들로 나뉜다. 현재 사할린 한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주로 일본령 가라후토에 이주했던 이들을 말한다. 구소련지역 러시아어권 동포인 카레이츠를 고려인이라 부르는데, 고려인은 연해주 지역과 북사할린에 거주하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이들이고, 사할린 한인은 일본으로 강제동원 되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 이주 15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인과 러시아 편입 70여 년의 사할린 한인은 역사와 정체성이 다르다. 그래서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을 고려인이 아니라 한인이라 칭한다.
KIN지구촌동포연대, 달력배달을 시작하다
KIN(지구촌동포연대, 이하 킨)과 사할린 한인과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킨에서 주최한 재외동포 NGO대회에 이수진 사할린주 한인 이산가족협회장이 참석해 사할린 한인 문제를 알리면서 사할린 한인 관련 활동이 시작되었다. 킨은 10여 년 전부터 매년 사할린을 방문해 동포들을 만나며 구술기록을 남겼고, 사할린의 각 지역을 다니며 한인들의 생활 실태와 애로 사항을 들었다. 그런데 동포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눈에 띄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집집마다 한복을 입은 사진이 인쇄된 한국 달력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한국 달력을 사용하는 이유를 물으니 한국의 풍경과 문화가 담긴 사진이 좋고, 음력이 표기된 달력이 필요해서라고 답했다. 러시아는 한국처럼 연말에 달력을 나누는 문화가 없는 데다 음력을 사용하지 않으니 한국을 방문할 때 달력을 구입하거나 영주 귀국한 동포가 사할린에 오면 달력을 선물하는 경우가 많단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서 연말과 연초에 사할린 방문 때면 여기저기 수소문해 달력을 모았다. 초과 수화물 요금을 지급하면서까지 사할린으로 달력을 가져갔다.
그러던 중 2013년 1월, 사할린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은 달력을 직접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동포의 집에 방문해 함께 저녁을 먹던 중 부엌에서 <새고려신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할린에서 주 1회 발행되고 있는 우리말 신문 <새고려신문>은 새해 첫 신문의 마지막 면을 1년 치 음력으로 채워 넣는데 부엌에서 몇 년 치의 <새고려신문> 음력이 쌓여 있는 걸 본 것이다. 이들은 왜 이토록 음력을 찾는 걸까?
고국에 대한 짙은 향수, 망향의 아픔을 달래던 민족문화
소련의 점령후 사할린 한인 1세들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적성국 출신이라는 점과 대다수가 무국적자였기에 겪어야 하는 한계와 차별이 있었다. 단적으로 무국적자들은 4Km 이상 가려면 경찰서의 허락이 필요했다. 고향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를 동경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냉전의 시대였기에 한국에서 이산가족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는 라디오(현 KBS 한민족방송)를 이불 뒤집어쓰고 들어야 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개적으로 한인들의 모임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았던 1세들에게는 고유의 풍습과 문화를 지키고 사는 것이 귀환에 대한 의지이자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제 사할린 한인들의 관혼상제와 관련된 사진들을 보면 빠른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모습이 많이 바뀐 한국보다도 오히려 옛것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결혼식은 한인들이 공개적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였기에 신랑, 신부 측 두 곳 모두에서 잔치를 했다고 한다. 제사와 생일을 음력으로 지내고(지금은 자식들 때문에 양력을 많이 쓴다), 손 없는 날을 택해 집수리도 했다. 초복에 무를 심고, 중복에 배추를 심어 김장을 하는 등 절기에 맞춰 농사일도 했다. 사할린은 섬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을 이용하는데도 음력이 필요했다. 물때(밀물과 썰물의 시기)에 맞춰 미역, 다시마도 따고 조개와 새우도 잡았다. 이러한 1세들의 생활양식을 1.5~2세대들까지는 이어받았다.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호감은 부모세대의 향수를 대물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음력달력은 한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매개물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의 탄생
사할린 한인들에게 달력이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면 작은 선물이 될 수 있게 킨에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달력의 기본 내용은 러시아를 따랐지만, 음력과 절기, 한국의 국경일을 표기했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짧은 러시아어 설명을 달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들로부터 한국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을 기부받아 달력을 꾸몄다. 온라인 모금은 기금모금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할린 한인을 알리는 효과도 가져왔다. 부족한 재원은 재외동포재단의 지원과 아시아나, NH농협생명 등의 기업후원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6번째 방문이 이어지면서 동포들과의 관계 또한 조금은 달라졌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시 만나기를 약속할 만큼 돈독해진 것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고국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선물이었고, 킨이 동포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동포들은 위안을 느끼고 있었다.
국가가 사할린 한인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사할린 한인에게는 강제동원과 미귀환의 문제가 얽혀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정확한 자료 확인, 일본 우정성에 잠자고 있는 우편저금문제 등 일본 정부와 풀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국가 간의 거시적인 문제가 답보상태이기에 동포들이 필요로 하는 지원은 크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강제동원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위로금 지원을 위해 2010년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가 설립되었으나 대한민국 국적자에 한해 지원이 이루어져 러시아 국적을 가진 1세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런 한정된 지원은 사할린 동포들에게 상처를 남겼고, 1992년 시작된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 역시 이들에겐 상처다.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한 1세와 그 배우자라는 영주귀국 대상의 제한은 그 가족과 함께 귀국할 수 없게 했고,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 1세대 동포들은 고령화에 따라 점차 독거노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홀로 남겨진 동포들이 다시 사할린으로 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 매년 사할린 한인 단체들이 모두 모여 결의문을 채택하는데, 여기에 양로원 건립과 운영지원을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 간에 해결해야 할 거시적인 문제들 뿐 아니라 동포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지원 또한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희망한다. 국권을 강탈당해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던 시절 형성된 동북아 지역 동포들은 우리와는 별개인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품어야할 우리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