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한 화성 지방 3·1운동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9년 3월 1일, 조선 민중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품고 만세를 부르짖었다.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자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를 갈망하는 몸부림이었다. 화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식 민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80여 개의 산상에 오른 화성 사람들은 저마다 독립에 대한 염원을 품고 횃불을 치켜 들었다. 화성의 각 지역에서는 마을 내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화성지방의 만세운동은 비폭력의 원칙이었지만 우정 면과 장안면 일대의 화수리 항쟁에서는 대규모 시위대의 규합과 사전협의를 통한 일제 통치기구에 대한 조 직적 타격이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시위대와의 격전 끝에 처단되었다.
당시 일제는 화성지방의 화수리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장단군 강상면의 시위와 함께 ‘가장 광폭한 시 위’의 하나로 보았다. 헌병대의 보고에서도 ‘이 지방의 폭민이 열악(獰惡), 광폭(狂暴) 한 것은 다른 데서는 많이 예를 보지 못하는 바’라고 말할 정도였다. 화수리 항쟁의 여파로 남양과 사강 소재의 경찰관 주재소가 일시 철 수하면서 곳곳에서는 일본인을 처단하고 시장을 괴멸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이는 독립운동 주모자 들이 가족들을 타 지역으로 피신시키는 정황이 포착되 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일제는 화성지방 민중들의 무력항쟁이 단순하고 우연 한 계기에 발생한 폭력적 사태가 아니라 일제로부터 독 립되기를 희망하는 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진압 방법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렵다고 보았다. 해안가로부터 내륙을 타고 들어오는 독립운동의 불길을 차단하고 3·1운동을 근절하려면 주모자를 찾아 박멸하고, 그 소굴을 뒤엎어야만 조선 독 립에 대한 잘못된 희망을 근절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발안(제암리의 동쪽 마을)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의 보호를 위해서는 독립운동 근거지인 제암리와 고주리에 대 한 소탕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3·1운동 탄압의 정점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919년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보병 11명을 이끌고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로 이동했다. 순사보 조희창과 일본인 사사카(佐板)를 앞세워 제암리에 도착한 후,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 다. 미리 명단을 파악해서 오지 않은 사람은 데리러 가는 등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교회 문을 잠근 후 총격을 가한 뒤 교회에 불을 질렀다. 이를 피해 도망쳐 나오는 사람은 뒤쫓아 가서 확인 사 살했다. 이 광경을 보고 남편을 찾아 달려오던 강태성의 부인과 홍원식의 부인 등 두 명도 함께 살해했다. 그 리고는 30여 채의 가옥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제암리에서 학살을 마친 아리타 도시오 (有田俊夫) 부대는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로 넘어갔다.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김흥렬과 그의 동 생 김성열, 김세열 그리고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세 열의 아들 김주남, 김주업 등 총 6명을 학살하고 3일 동 안 불에 태웠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일제의 3·1운동 진압 정책 하에 이루어진 다른 어떤 사건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한 사건이었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太郞)는 화근을 뿌리째 뽑을 것과, 군대의 신중함이 지나치면 도리어 만세운동이 증장(增長) 될 우려가 있으니 강압 수단을 써 서라도 복종시켜 3·1운동을 종식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경무부장 시오자와(鹽澤義夫)도 파리채로는 감당되지 않으니 단호한 처치를 할 것,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 시위 군중에 대한 ‘적절한’ 병기를 사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개인의 일탈행위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다. 면사무소, 주재소가 공격받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지 역을 중심으로, 진압 방식도 주모자를 색출해 검거하기 보다는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보복과 박멸을 목표로 치밀한 시나리오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화성지역 3·1운동에 대한 진압과정의 최고의 정점에 제암리·고 주리 학살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경악한 일제의 학살 만행
제암리 학살사건은 사건 직후 현장의 참상을 목격한 커티스(R.S.Curtice) 미국 부영사, 테일러(A.W.Taylor) AP통신기자, 언더우드(H.H.Underwood)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 선교사 등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이들에 의해 밝혀진 제암리 학살 사건의 참상은 미국 의회, 해외 언론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져 커다란 공분을 샀다. 임시정부는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에 대한 일 제의 잔학행위를 각종 선전물로 발간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일본의 지배로 인해 조선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국제사회는 제암리 학살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비인도적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조선 민중들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한 일제는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인정하게 되면 상황이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학살 방화는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太郞)는 그의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처분하면 아주 간단하겠지만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필毒筆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학살 방화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 제국의 입장은 심히 불이익이 되며 한편으로는 조선 안에 폭민을 증가 조장시키고, 또 진압에 종사하고 있는 장졸(將卒)에게 의혹의 생각을 갖게 하는 불합리함이 있으므로 ‘저항하므로 죽였다’는 것으로 하고 학살에 대한 것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사건의 참상이 폭로되면서 사건 전부를 부인하는 것이 오히려 일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조선 총독의 입장을 받아들여 내부 조율을 거친 후, 어느 정도 과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기에 이른다. 약간의 행정처분을 해두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무력진압의 방법에는 적절하지 않은 점이 있지만 임무 수행상 필요하다고 확신하여 행하였다는 점, 과실로 인한 범죄는 범죄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점, 학살사건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관련자들에게도 형식적인 징계를 내렸다. 이처럼 내부적으로 이미 조율을 마친 사안인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한 것은 3·1운동 이후 악화된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였던 것이다.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에 대한 무죄 판결은 학살을 정당화 합법화함으로써 3·1운동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한 일제 식민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향후 저질러질 유사 사건에 대비해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4.15를 기억하다
화성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3·1운동을 가장 극악무도하게 탄압한 사건 중의 하나다. 화성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공세적인 저항운동을 펼친 화성지역 3·1운동과 그 과정에서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들이 보여줬던 적극적인 항거에 대한 계획적인 보복이자 항일운동 주도세력에 대한 박멸을 목표로 한 학살행위였다.
당시 일본 헌병자료에는 제암리·고주리에서만 사망자가 46명, 부상 23명, 가옥 345채가 불타고 379명이 검거되었다고 기록됐다. 이는 일제가 보고한 자료임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규모는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 전역에서 자행된 일본의 학살사건으로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심문·재판기록이 없어 심사도 못 받은 경우도 많다.
지금은 그러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평화로운 농촌마을이지만, 100년 전 오늘 독립을 위한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던 곳이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서면 펄럭이는 수많은 태극기와 사건의 참상을 짐작하게 하는 3·1운동 순국기념탑, 순국선열의 묘역과 기념관이 세워져있어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하며 분연히 일어났던 그날의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독립 정신과 그 숨결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하다.
다시 새겨보는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00주년
1982년 9월 제암리 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과 학살의 현장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돌아가신 29선열의 항일애국정신을 기억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나라사랑의 산교육장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2001년 3월 1일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이 개관하였다.
기념관의 전시실에는 화성지역 3·1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과 유가족들의 증언, 해외로 알려진 제암리 사건, 유해 발굴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족회의 활동상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및 4.15 화성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만세운동을 펼치며 걸었던 만세길 개통식을 맞아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서는 ‘코딩으로 걷는 화성3·1만세길’, ‘제암리에서 듣는 3·1운동이야기’, ‘사강시장 보드게임’, ‘교육 체험 박람회’, ‘100주년 특별전 및 학술세미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올해로 100년,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 그 어떠한 인정도, 사죄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자주와 독립을 추구한 민족운동의 대표적 상징이자 우리 민족 모두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건이다. 우리가 제암리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의 역사에서 다시는 이러한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단순히 일제의 학살 행위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자주와 평화,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되짚어 보게 하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