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 선거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정진성 교수가 위원에 당선되었다. 7월 초에는 정 교수의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창고에서 찾아낸 ‘조선인 위안부’ 동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여성과 인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해 온 정진성 교수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담 : 서현주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UN 인권소위원회 위원, UN 인권이사회자문위원회 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유엔인권정책센터 소장,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소장, 서울대 인권센터 소장, 한국사회학회장과 한국여성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일본군 성노예제》, 《현대 일본의 사회운동론》, 《인권으로 읽는 동아시아》(공저), 《한국현대여성사》(편저),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근현대사》(편저) 등이 있다.
Q1. 교수님 방학 중이라 더 바쁘실 것 같은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관심을 갖고 계신 연구 주제나 참여 중이신 활동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정진성 요즘은 방학이라 수업은 없는데 최근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선거에 다녀오자마자 제주도에서 제주인권회의가 열려 거기 참석하고 돌아오느라 좀 바빴어요. 이번 회의를 통해 새롭게 한국인권학회를 창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제가 초대회장을 맡게 되어서 준비하는 상황이고요. 얼마 전에는 2004년에 출간했던 《일본군 성노예제》 책의 개정판을 발간하는 작업을 했고, 또 조만간 그동안 연구했던 재일동포들의 인권 관련 내용들을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기 위해 준비하는 중입니다.
Q2. 비교사회학을 전공한 뒤 오랫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해 오셨는데, 처음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가 있을까요?
정진성 제가 일제 강점기 사회 변동과 여성 노동에 관한 논문들을 썼는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 계기는 아무래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공동대표를 맡으셨던 이효재 선생님의 부름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 같아요. 1990년 7월에 윤정옥 선생님이 정신대연구회를 만드신 뒤 11월에 이효재 선생님과 정대협을 설립하셨는데, 이후 여성 노동 관련 논문을 쓴 저를 부르셔서 정신대연구회를 맡아달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연구회를 맡은 이후 사람들을 모아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자료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연구회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을 거치면서 현재 정신대연구소로 한 단계 격상이 되었습니다.
Q3. 교수님께서는 정신대나 일본군‘위안부’가 아닌 ‘일본의 성 노예제’라는 용어 표현을 주장하시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정진성 사실은 ‘위안부(慰安婦)’라는 용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대체 누구를 위안한다는 것인지. 제가 관련 연구를 하다 보니 1940년대 초반 경 일본에서 만들어진 문서에 ‘위안소’라는 용어가 나오고, ‘정신대(挺身隊)’는 천황 칙령 가운데 ‘근로여성정신령’이라는 내용이 발견되더군요. 당시 일본에서는 공창(公娼) 비슷한 개념으로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후 오랫동안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 표현을 써 왔어요. 실제 정신대란 ‘정부가 노동을 착취하는 부대’라는 의미이고 여기에는 의료정신대, 근로정신대 등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피해자와 제도를 특정하는 단어로는 적합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을 쓰기에는 종군 자체에 자발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이 또한 적절치 않았죠. 그래서 고민 끝에 일본군‘위안부’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1992년 UN에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영문으로 ‘mil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일본군 성 노예)’이라 표현했는데 이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피해 할머니들의 입장에서는 노예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참담하게 느껴지실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두 용어를 함께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문제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은 ‘일본군 성 노예제’라고 생각합니다.
Q4. 1992년 처음 국제사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하신 지도 어느 덧 25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거두신 가장 큰 성과 vs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진성 개인적으로는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국제사회에 가서 폭로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부분도 있었어요. 하지만 일본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해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었죠. 물론 지금도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UN에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생각보다 국제사회의 반향이 크자 일본 정부도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결정적으로 ICJ(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 국제인권법률가협회)에서
아쉬운 부분은 아무래도 일본군‘위안부’를 전시하 여성의 보편적 인권 문제로 가져가다 보니, 이 문제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식민지’를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사실 우리는 적군이 아닌 식민지 여성이었는데, 강제로 연행된 상황에서 오랜 시간 감금 상태로 끌려 다니며 성을 착취당한 거잖아요. 물론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서구 사회가 주류를 이루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후배 연구자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잘 풀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Q5. 지난해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여러 생각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합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또 새 정부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정진성 역사 문제는 시간을 두고 자료를 쌓아 연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해 제대로 된 자료집 하나 나오질 않았어요. 더군다나 체계적인 관련 연구도 부족한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이 문제를 단지 외교로만 해결하려고 한 게 지난 한·일 위안부 합의였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역사적으로 민감한 사안일수록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협상 과정에서도 막바지에 너무 급하게 진행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거든요. 결국 이 합의에 발목이 묶여서 지금까지 경제·안보·환경 등 양국의 여러 다른 문제들마저 협력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다행히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제라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절차상 문제를 꼼꼼히 따져보고, 그러는 사이 경제·안보·환경 등의 문제들은 그것대로 분리시켜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Q6. 얼마 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맞물려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와 철거를 놓고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철거를 요구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어떤 대처가 필요할까요?
정진성 원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소녀상을 설치한 것은 정대협이었는데 이후 부산 일본 영사관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소녀상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이게 외교적으로 문제가 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는데 이 정도로 큰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면 뭔가 좀 체계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정대협 측에서 중심을 잡고 협의를 통해 체계화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고, 정부에서는 시민사회의 활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게 맞겠죠.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Q7. 결혼이주여성의 인권 증진과 대학 내 여성의 권익 신장, 여성학 제도화 등을 위해서도 많은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정진성 제가 학부생이던 1972년만 해도 사회학과에 여자가 저 혼자였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1984년에 돌아와 보니 여성학, 여성 인권이 대두되는 움직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정대협 활동을 시작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성 관련 연구와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1996년 서울대 부교수로 왔는데, 그때 사회학과에 여성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함께 여성연구소와 여성학협동과정을 만들었고, 사회대 다른 여교수들과 여교수회 등을 만든 거예요.
결혼이주여성의 문제는 사회학을 연구한 여성학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좀 심각하게 느껴지는데, 정부나 여론의 관심이 부족한 것 같아요. 2000년대 이후 외국 여성들은 결혼이 아니면 우리나라 입국이 어려워졌거든요. 물론 잘 정착해서 살아가는 여성들도 있지만 나이 차 많은 남편과의 문화적 갈등,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가정 폭력과 이혼에 이르는 여성들이 많죠. 그래서 2007년부터 베트남 호치민에서 결혼을 통해 한국 이주를 계획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1일 교육 프로그램을 열었고 지금은 여성가족부가 담당하는 사업이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관련 문제들이 많죠. 요즘은 가정 폭력 등을 이유로 자녀를 데리고 본국으로 가 버린 이주여성들의 이혼 문제,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어머니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인 2세들의 정체성 문제, 교육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Q8. 최근 재일동포 인권 문제 연구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다 했는데 어떤 내용들인지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진성 재일동포는 논문을 쓰며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궁금했어요. 현재 그들 중에는 일본에서 4~5대를 넘겨 살면서도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사람들이 33만 명 정도, 그중 분단 이전의 조국인 ‘조선’적을 보유한 사람들이 3만 명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정권의 정부에서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의 우리나라 입국을 불허했는데, 이런 것들은 개선이 되어야 할 부분이죠.
재일 조선학교 문제는 더욱 복잡합니다. 총련이 설립 . 경영하고 있어 일본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고, 한국 정부도 개입하기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지금은 학교 수도, 학생 수도 많이 줄어든 상태예요. 하지만 이곳 재학생의 70~80%가 한국 국적 아이들인데 이들에 대한 교육에 우리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9. 지난 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셨습니다. 앞으로 위원회에서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활동하실 계획인가요?
정진성 이전에 활동했던 인권소위원회가 테마별로 보고서를 내고 활동을 하는 것과 달리,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국가 보고서를 심의하는 곳이에요. 보통 4년에 한 번씩 제출하는 국가별 정부 보고서와 NGO 보고서를 같이 검토하며 각 나라의 인권 문제에 대해 권고안을 내는 거죠. 나는 일본과 한국 보고서를 검토할 때 조선학교나 결혼이주여성 문제에 주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이제 나이가 드니까 조금씩 건강에 무리가 오지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힘을 보태야죠.
Q10. 끝으로 재단 자문위원으로서 그간 동북아역사재단이 해온 역할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당부 혹은 제언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진성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만든 기관이잖아요. 지난해 설립 10주년을 맞았는데, 별도의 연구소도 설립하고 자료도 많이 축적한 독도 문제 외에 뭔가 뚜렷한 성과가 보이는 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지금 재단의 자문위원이 30명 정도인데, 여성 자문위원이 나를 포함해 2~3명밖에 안 되더라고요. 이런 부분도 좀 개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