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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도시 이야기
일본 모던의 상징, 고베
  • 박삼헌(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

막말 정치의 뜨거운 감자’, 효고(兵庫) 개항문제

막말 정치의 ‘뜨거운 감자’, 효고(兵庫) 개항문제1858년 체결된 일미수호통상조약에서 하코다테(箱館), 니가타(新潟) , 가나가와(神奈川, 요코하마), 효고(兵庫), 나가사키(長崎)의 개항이 결정되었다. 이중 하코다테, 가나가와(요코하마), 나가사키는 이듬해에 바로 개항되었고 효고의 개항은 5년 후인 186311일 오사카의 개시와 함께 예정되었다. 그러나 경제의 중심지 오사카는 물론이고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효고의 개항문제는 점차 격화되는 존왕양이운동을 배경으로 뜨거운 감자중 하나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1862년 막부는 서구 열강과 다시 교섭하여 효고 개항과 오사카 개시를 5년 연기하였다.

마침내 186811, 고조되는 정치적 혼란을 배경으로 효고 개항과 오사카 개시가 실행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개항이 허용된 지역은 당시 효고의 중심지로부터 서쪽으로 3.5km 정도 떨어진 고베무라(神戸村)였다. 이것은 반대파의 정치적 비판을 고려한 막부의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막부는 이틀 뒤 반대파에 의한 이른바 왕정복고 쿠데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로 메이지유신 이후 효고에는 직할현이 설치되었는데 그 행정 책임자는 겨우 28살밖에 안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문명개화의 상징 공간, 고베(神戶)의 탄생

고베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서구 열강에 임차되어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이 허용되는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었고 그 경비는 각국의 군대가 담당하였다. ‘왕정복고 쿠데타로 천황 정부가 수립된 이후 처음 발생한 외국인 습격사건은 미국 병사들과 고베를 지키던 비젠 번(備前藩) 군사들이 충돌했던 고베 사건이다. 고베 사건의 발단은 번 군사의 대열을 가로질러 가려던 미국 병사의 행동 때문이었다. 이 같은 미국 병사의 행동은 기존의 무사법에 따르면 즉결 처분이 가능한 것이어서 비젠 번 장교는 그에 따랐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베 사건은 기존의 무사적 가치체계와 서구 열강의 만국공법적 가치체계가 충돌한 사건이다.

고베 사건은 천황 정부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아들여 비젠 번 장교를 사형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왕정복고 쿠데타로 집권한 천황 정부가 막부를 대신하는 일본의 대표 정부로 인정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천황 정부는 양이가 아닌 개국 화친을 전면에 내걸었다. 이후 천황 정부에게 고베는 단순한 개항장을 넘어 개국 화친을 실천하고 보여주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일본 최초의 양복점청량음료 라무네식용 소고기(고베규) 사육영화 상영골프장(롯코산) 건설수족관 건설바나나 수입 등 천황 정부의 문명개화정책 결과물이 고베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결과 고베는 그 어떤 개항지보다도 메이지의 문명개화를 상징하는 모던도시로 발전하였다.


막말 정치의 ‘뜨거운 감자’, 효고(兵庫) 개항문제 


고베의 또 다른 얼굴, 식민지 조선인의 이민 공간

1908428일 브라질로 이민 가는 최초의 일본인 781명을 실은 가사토마루(笠戸丸)’가 고베항을 출발하였다. ‘문명개화식산흥업을 슬로건으로 추진된 근대화 정책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라는 국가적 차원의 영광과 함께 부의 불균형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어두움도 초래하였다. 고베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어두움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브라질로 떠나는 희망의 출발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베는 식민지 조선인에게도 제국 일본통치의 어두움을 극복하고 희망을 찾아 도착한 출발점이었다. 현재까지도 고베를 포함한 효고현에 자이니치(在日) 코리언이 가장 많은 이유다.

고베에 이주한 식민지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발생한 불황으로 실업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흡수한 것이 나가타구(長田区)의 고무 산업이었다. 나가타구의 고무 산업은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의 고무공장이 소실된 후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는 고베시 전체 조선인 인구의 절반을 나가타구가 차지할 정도였다. 패전 이후에도 나가타구의 고무 산업은 고베에 거주하는 자이니치를 상징하는 산업으로 자리잡았으며 1995년 한신대지진 위기도 극복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7년 개항 150년을 기념하는 고베

지난해 121일 시작된 고베 시립도서관의 고베 개항 150년 사진전을 필두로 현재 고베에서는 개항 15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한창이다. 그 취지는 나라시대와 헤이안시대부터 대륙이나 한반도와의 교류 거점이었고, 1868년 개항 이후에는 여러 외국과의 교류로 독자적 고베 문화를 배양해 온 고베의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는 아베 정권과 그의 출신지 야마구치현(山口県)이 메이지 정신을 본받아 일본의 강함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고자 추진하는 메이지 150기념행사와 그 의미를 달리하는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자이니치를 비롯한 제국 일본 시기 이민자들의 기억이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