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영화의 세기였다. 19세기가 막을 내릴 즈음 등장한 영화는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락의 왕좌에 올라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이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 있던 1903년 6월부터 영화는 대중에게 사랑을 독차지하며 매일 매일 도시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1919년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는 연쇄극의 일부로 영화제작이 시작되었다. 연쇄극 필름시대를 지나 1923년부터는 극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처음 제작한 극영화들은 대체로 고소설을 각색하거나 일본 신파를 번안한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6년 10월 상영된 나운규(羅雲奎, 1902~1937)의 '아리랑'은,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복판에 폭탄을 터트린 것만큼이나 가슴 짜릿한 감동이었다. 옛 이야기나 남 이야기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우리 이야기를 소재로 했기에, 영화를 오락이 아닌 민중의 계몽과 교화 더 나아가 운동 차원으로까지 이끄는 계기로 작용했다.
간도 명동중학에서 민족의식에 눈 뜨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나운규는 구한말 군인 출신이던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독립운동 양성소 역할을 담당하던 간도명동중학을 다니며 체득한 민족의식을 통해 민족주의자로 성장했다. 명동중학 재학 때, 31운동에 참여하여 일경에게 수배를 받던 그는 시베리아로 도주하여 그곳을 방랑했다. 북간도로 돌아온 그는 독립군의 비밀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학문을 통해 더 큰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도판부 가담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청진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함흥에 있던 소인극단인 예림회(藝林會)에 가입하여 배우가 된 나운규는 부산에 세워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딛는다. 이후 '총희의 연'(일명 운영전, 1925)에서 단역을 맡아 영화배우로 처음 등장했고, 백남프로덕션에서 제작하고 이경손(李慶孫)이 연출한 '심청전'(1925)에서 심봉사 역을 맡아 주목받기 시작했다.
1926년 일본인 요도 도라죠(淀虎藏)가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한 나운규는 처음으로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는다. 나운규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 '아리랑'과 당시 사회 상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착안하였다.
610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때였기에 거리 곳곳에서 일경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며 끌려가는 학생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정신병자가 된 '아리랑' 속 주인공 최영진은 6ㆍ10만세운동 당시 거리를 메웠던 학생들의 모습을 투영시킨 인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각지에서 청년회가 조직되어 이를 중심으로 한 소작쟁의가 한창이던 시기, '아리랑'은 조선의 농촌 문제, 지주소작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밤을 위무하던 그의 영화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아리랑'이 개봉되자 밀려든 관객들로 극장은 만원이었다. 관객들은 지주의 하수인인 마름 오기호의 횡포에 분노했으며 미친 영진이 마름을 살해하는 장면에선 통쾌함을, 경찰에 붙들려가는 영진의 모습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아리랑'은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영화들을 더해도 얻을 수 없는 찬사와 호응을 얻었다. 영진 역으로 등장했던 나운규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조선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아리랑'이 개봉된 후 1920년대 후반은 나운규의 시대였다. '아리랑'이 성공한 뒤 나운규는 시베리아 유랑 시절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풍운아'(1926)와 북간도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소재로 한 '사랑을 찾아서'(1928), 나도향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벙어리 삼룡'(1929)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대구에 있는 만경관에서 '사나이'(1928)를 상영할 때에는 2층 객석이 주저앉을 정도로 그가 만든 영화는 어디서나 관객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빛이 찬란할수록 그림자는 더 어두운 법. 나운규는 크게 성공했지만 방탕과 방종으로 수중에 남은 돈은 없었고 동료들에게 신망까지 잃었다. '아리랑, 그 후 이야기'(1930)에 출연했을 때는 사회주의 계열 영화인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조선 극장가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조선 영화계는 극심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나운규 역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기 힘든 상황이었다.
1935년 나운규는 차상은이라는 젊은이한테 투자를 받아 유성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제작자 차상은이 원한 작품은 '아리랑' 제3편이었다. '아리랑'을 계속 만드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나운규는 의욕을 내서 동시녹음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술부족으로 촬영은 실패했고 고려영화협회 이창용에게서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이미 애초 예상했던 제작비를 훨씬 초과한 상태였다.
폐병을 앓고 있던 나운규의 몸은 쇠약해졌다. 요양을 통해 안정을 취해야 했으나 '아리랑' 제3편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쉴 틈이 없었다. 1936년 겨울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를 연출한 후 건강은 몹시 나빠졌다. 결국 나운규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937년 8월 9일 새벽 쓸쓸히 눈을 감았다. 영결식은 그의 영화가 주로 상영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나운규가 만든 영화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자 도시의 밤을 위무하던 대표적 오락물이었다. 그의 영화가 없었더라면 우리 과거가 얼마나 쓸쓸했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운규의 영화가 남한과 북한에서 고루 인정받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