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도청에서 추천하여 영광스러운 독도학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가족들은 여전히 기쁨 반, 불안감이 반이다. 사실 독도 문제는 한일 간 다이너마이트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이 문제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고,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재일 한국문화원에서도 독도 문제는 금기(禁忌)하는 대상이다.
이는 일부 일본인들의 성향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일부 일본인' 안에 이성적인 우익 단체 인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2~3년 전 일본에서 그런 우익 인사와 북한 학자들과 같이 독도 문제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열었고, 지난 1월 이 기록을 담아 《동아시아에 평화의 바다를(東アジアに平和の海を)》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당시 심포지엄에서 역사학계가 거둔 독도 연구 성과를 나름대로 이야기했는데,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독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진 한일 관계 논쟁이 계기였다. 약 20년 전 한일 간 소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비등했는데, 이때부터 이 문제를 포함해 한일의 모든 문제에 관해 사이버 공간에서 일본인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방대한 기록은 웹사이트 반월성통신(www.han.org/a/half-moon)에 공개하고 있고, 그 중 하나가 독도 문제였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2007년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의 도움을 받아, 독도 문제 권위자 나이토 세이츄(内藤正中)와 함께 《竹島=独島論争》을 발간했다. 이 책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많은 도서관에 배치됐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역량 부족을 절감했고, 마침 약 40년 동안 근무한 가스화학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본격적으로 독도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독도 연구 10년을 돌아보며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자료를 발굴하는 일일 텐데, 독도에 관한 자료는 한국보다 일본에 압도적으로 많다. 예를 들어 안용복 사건에 관한 중요 자료는 일본 여러 지역에 있으며, 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관련 자료는 미국이나 영국의 것을 공식 복사한 사본을 포함해 거의 모든 자료가 일본에 있다. 심지어 독도의용수비대에 관한 중요 자료도 일본에 많다.
일본 자료를 가장 열심히 연구한 사람은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다. 돗토리(鳥取) 현립 박물관에 있는 독도 관련 고문헌들에는 가와카미가 쓴 쪽지가 끼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는 처음에 독도 연구를 포기했다고 한다. 나도 국립공문서관에서 〈이소타케시마 각서(礒竹島覚書)〉를 보았을 때 가와카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를 본 적이 있다. 또 국립공문서관에는 가와카미가 '竹島 외 일도' 포기에 관한 태정관 자료를 본 기록이 있다고 한다. 가와카미는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외무성 관리로서 일본에 불리한 자료는 덮고, 유리한 자료만 선택한 뒤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일본 정부 주장을 구축했다. 시마네(島根)현 관리 다무라 세이자부로(田村清三郎)가 한 연구도 마찬가지다.
이런 선행 연구의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호리 가즈오(堀和生)가 애를 써서 드디어 앞에서 언급한 태정관 자료 등을 발굴했는데, 호리처럼 일본 자료를 중심으로 독도의 진실을 학문적으로 밝히는 것이 필자의 목표다.
첫째, 연구서 《안용복 사건에 관한 검증》에서는 안용복이 일본으로 연행당하는 도중 독도를 확인한 것을 한일 양국 자료에서 밝혔다. 안용복의 확인은 그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주장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또 1696년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을 쫓아냈다는 진술은 그 진위가 한일 간 쟁점이 됐는데, 이는 1695년이라면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둘째, 연구서 《한말 울릉도독도 어업》을 비롯하여 관련 논문에서는 1882년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만난 일본인들은 일본 해군과 더불어 울릉도에서 어로활동을 하며 울릉도를 국제법적으로 탈취하려 한 정황이 있었음을 밝혔다. 또, 이즈음부터 관찬서에 기술한 우산도는 존재를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됐는데, 대신 독섬이라고 불렸던 독도가 군함 항해일지 외에도 일본 여러 자료에 '獨島'로 표기되어 있음을 밝혔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후에도 관보에서 '랑코도'라 부르고, 울릉도의 속도처럼 인식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셋째, 연구서 《독도 어업의 역사와 영유권 문제》에서는 1836년경 에도막부 기관이 〈그림〉처럼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 현재 시마네현은 독도 근처 평화선 안에서 많은 일본 어선이 나포된 것처럼 홍보하고 있으나, 나포된 어선은 1척도 없었음을 자료로 증명했다.
"독도 문제 해결 관건은 일본에 있다"
최근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왜 누락됐는지하는 과정과 함께 그 이유를 실증적으로 밝히고, 독도 문제는 결과적으로 강화조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그리고 강화조약 발효 직후 일본 순시선이 자주 독도에 침입한 사건에 관해서는 일본 해상보안청 1차 자료를 입수해 사건 경위 등을 밝힌 동시에 일본 정부의 독도 정책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독도 영유 의식이 거의 없던 일본 정부는 평화선 문제를 계기로 독도를 탐내기 시작하고, 1953년 6월부터 1년 간 독도에 일본의 영토 표주를 세웠으며, 독도를 80% 탈취했음을 밝혔다. 일본의 횡포는 해양경찰대와 독도자위대의 활동으로 끝났다.
앞으로도 계속 일본 자료를 발굴하고 독도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런 생각으로 독도에 관한 일본 자료와 논문 등을 모아 웹사이트 '竹島=独島論争(資料集) (www.kr-jp.net)'을 운영해 왔는데 이를 좀 더 보강할 생각이다. 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읽을 수 있는 독도 해설서를 일본에서 출판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독도 문제 해결의 진전과 후퇴의 관건은 일본에 있다고 생각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