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은 한일민족문제학회와 공동으로 지난 11월 14일 재단 대회의실에서 "동아시아의 근현대 국제전쟁과 평화체제"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국가 간 갈등의 뿌리는 전쟁일 때가 많다. 동아시아 지역 여러 나라들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중반까지 전쟁을 겪고, 그 전쟁 때문에 생긴 갈등과 대립으로 현재까지도 몸살을 앓고 있는 예가 많다. 특히 이 지역 역사인식 문제, 민족차별 문제, 영토 문제는 대부분 전쟁을 겪으며 파생했고, 그것이 원천이 되어 국가 간 상호이해를 막고 대립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역내 평화구축을 위해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신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한국, 일본의 학자 10여 명이 참여해 제1부 '근현대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재조명', 제2부 '동아시아 전쟁사와 평화체제의 구축'을 주제로 기조강연과 발표, 토론 등으로 진행했다.
문화·역사·사회·경제의 산물로서 지명과 사회정의
미국 웨스턴미시간대학의 조셉 스톨트만(Joseph Stoltman) 교수는 '지리교육과 지명 표기 문제'에서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 증진과 문제해결능력 향상을 위해 지리교육학 주제로 지명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회정의(social justice)란 어떤 쟁점에 관해 어느 일방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이익을 공정하게 고려해야하는 원칙이자 사회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지명은 장소와 지역의 문화·역사·사회·경제의 산물이므로 사회정의와 지리교육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으며,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는 사회정의 차원에서 지리교육에서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버지니아주 교민인 최연홍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미국 버지니아 주 동해병기법이 중요한 교육 가치와 교육 목표를 실현한 모범 사례임을 강조하였다. 미국 주정부, 지방정부에서 교육의 중요한 임무는 정당성(justice)을 함양하는 것이며, 지명 병기는 미국 학생들에게 공정함(fairness)이라는 정의를 습득하도록 하는 좋은 사례라는 것이다. 따라서 버지니아주 동해병기법은 미국의 다른 주나 국제사회가 동해/일본해 병기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노담화 검증은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상징"
이번 회의에서는 동북아지역 역사 갈등의 본질인 동아시아의 근현대 국제전쟁을 조명하고 동북아의 역사화해와 평화구축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나아가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이 억압, 빈곤, 차별을 극복하고, 국경을 초월한 협력체제로서 '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 전망하고자 했다.
먼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히토쓰바시(一橋)대학 명예교수가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군사사 연구의 현재'라는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하면서 평화공동체 구축을 위한 전망을 제시했다. 요시다 유타카 명예교수는 최근 일본 우익들 사이에 번지는 '아사히신문 때리기', '고노담화 검증' 논란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맹렬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상징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군사사 분야에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연구하고 일국사(一國史) 중심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에서 온 10여 명의 연구자들은 2개 세션으로 나뉘어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는데 첫 번째 세션에서는 근현대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국제전을 재조명했다.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이제까지 한국문제를 간과한 러일전쟁에 관한 역사담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탈유럽중심과 탈식민주의 역사해석을 사례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냉전체제 해체 후 역사학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러일전쟁 초기 러시아가 설립한 극동정보기구 '상하이정보국'의 자료를 활용해 러·일 개전에서 한·일 강제병합에 이르는 시기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살펴봤다.
김종식 아주대학교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조선의 노동정책과 그 대응'이라는 발표에서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이 중심이 되어 제출한 노동문제 관련 전후처리 해결책이 유럽전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승전국이라는 지위를 차지한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동북아 지역협력을 위한 방안 연구
두 번째 세션에서는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집중 고찰했다. 고케쓰 아쓰시(纐纈厚) 야마구치(山口)대학 특임교수는 동아시아에서 '냉전 시스템'과 '얄타 시스템'이 가동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 두 가지 시스템에서 해방되어 눈에 보이는 폭력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폭력(억압, 빈곤, 차별 등)에서도 해방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이 우선 국경을 넘는 '협력'체제로서 '동아시아평화공동체' 구축을 전망하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강조했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독도침탈과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포츠머스조약, 베르사유조약이 국제법 체계에서 그 실체가 무엇이며, 이 조약들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 동북아 평화체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검토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평화조약이 실제로는 오히려 침략 체제를 공고하게 했음을 규명하고, 이것이 이 조약들을 재검토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김태기 호남대학교 교수는 동아시아 전쟁사를 '화이사상을 중심으로 한 봉공 관계 시대', '근대 제국주의의 시대', '냉전체제시대'와 같이 구분하여 그 특징을 조망했다. 또 냉전 붕괴 후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움직임을 미·중 관계 중심으로 살펴본 후,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동북아 한·중·일 3국이 상호이해하고 교류 협력해 평화롭게 번영하는 동아시아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마련한 행사다. 전쟁이 뿌린 갈등의 씨앗을 제거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지 진지하게 탐구한 자리였다. 또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진 근현대사에 대한 상호이해와 공동인식 그리고 연대성 제고라는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