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동아시아의 역사인식 공유를 통한 역사화해를 위해 '일제침탈사 국제공동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11월 20일, "정의 아니면 현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와 동남아에서의 전후 강제동원 처리"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호에는 대만의 '강제동원' 연구자로 이 학술회의를 찾은 차이후이위 교수와 재단의 이장욱 연구위원이 만나 동아시아 지역 역사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실상과 전후 처리 양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_편집자 주
차이후이위(蔡慧玉, Hui-yu Caroline Ts'ai) 전임연구원
대만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중앙연구원(Academia Sinica) 대만사 연구소에 재직 중이다. 일제시기 대만사와 중국 근현대 사회사를 전공하였으며,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대만에서 일어난 강제동원, 일본군'위안부' 구술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대표논저로 Taiwan in Japan's Empire-Building: An institutional approach to colonial engineering (2008, Routledge)가 있다.
Q 이장욱 대만에서 일제'강제동원' 역사연구에 대한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현재 연구 동향은 어떤지?
A 차이후이위 대만에서 강제동원 연구는 1990년대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강제동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일반인들은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일부 교과서가 중국을 '침략'한 것이 아닌 '진출'했다고 기술한 1982년 '교과서 파동' 후,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반일감정이 높아졌다. 특히 1991년에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일본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 것이 다른 나라에서도 배상 문제에 관심이 커지는 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당시 대만에서도 일본군에 복무했던 대만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여러 차례 벌였다. 그 결과 강제동원이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고 연구 필요성도 높아졌다. 구술과 서면 인터뷰 형태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후 인터뷰 내용과 다른 자료들을 결합한 연구서도 여럿 나왔다.
현재는 일본과 대만 정부가 보상에 합의해 이 문제가 상당 부분 마무리됐고, 강제동원 연구가 과거만큼 활발하지 않다. 여전히 일부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1990년대에 비해서는 많이 약해진 셈이다.
Q 이장욱 강제동원이나 일본군'위안부'를 주제로 한 구술사 연구 경험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A 차이후이위 1994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강제 동원했던 이들과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강제동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강제동원 관련 연구를 진행하였다. 지역사에 관심이 많아 2년 넘게 자료를 수집하였기 때문에 이때 모아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였다. 중앙연구소 동료들도 비슷한 주제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서면 질문지를 보냈는데 지역별, 육군 해군 특수부대 별로 나누어 진행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에게 공개한 인터뷰는 40건 정도다.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도 많았고, 인터뷰에는 응했지만 출판을 거부한 사람도 있다. 대만은 1980년대 후반까지 수십 년간 계엄령이 발효된 역사가 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초까지도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과거를 밝히기를 두려워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당시 일본을 상대로 한 보상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답변하기도 했다. 그 외 과거 강제동원 경험자들을 한데 모아 이야기를 듣는 자리도 마련했는데, 여기에서 당시 군부대 인명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많은 피해자들과 만났다. 연구 결과를 출판하자, 대만 사회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강제동원 실태에 상당히 충격 받았다.
Q 이장욱 일제시기 대만에서 강제동원은 어떤 형태와 규모로 진행되었는가?
A 차이후이위 대만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갑제(保甲制)를 활용하였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만 주민 약 20만 7천 2백 명이 일본군에서 복무하였다. 이들 중 약 9만 2천 명은 대만 내 주둔 부대에서 복무했지만 6만 명은 남태평양, 1만 명은 일본, 2만 3천 명은 중국으로 보내졌다. 이들 중 최종 사망자와 실종자 수는 최대 5만 3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Q 이장욱 일제시기 대만총독부는 한국과 달리 문민통치를 표방했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A 차이후이위 한국과 대만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 상황이 무척 다르다. 일단 대만은 1905년에 할양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일본 지배를 받은 기간이 더 길다. 또, 한국은 일본에 강제병합될 당시 독립 주권 국가였지만, 대만은 청나라의 한 지역으로 청일전쟁이 끝난 후 공식적으로 일본에 할양되었다. 따라서 일본 통치에 대한 대만 주민의 반발도 한국만큼 강하지 않았다. 특히 다이쇼(大正)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전까지 군인 출신들이 총독을 맡았던 것과 달리, 문민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0년대쯤에는 일본에 대한 반발이 거의 사라졌다.
Q 이장욱 전후시기 배상과 사과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A 차이후이위 먼저 국가 차원에서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1년 전후처리를 명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총 49개국이 체결한 이 조약에서 일본이 승전국인 연합국 측에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지만, 당시 일본의 피폐한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연합국이 배상을 면제해 줄 수 있다는 조항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 결과 실제 일본에게서 금전 배상을 받은 국가는 필리핀과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네 곳뿐이다. 그중 미얀마는 연합국 일원이 아니었고, 인도네시아는 조약 비준을 거부하였다.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은 경제협력과 기술지원 형태로 일본에게서 배상을 받았다. 이러한 경협 방식 배상으로 오히려 일본산 제품과 기술 수출이 느는 등 일본 경제가 큰 혜택을 봤다.
그러나 대만은 국가 차원 배상을 받지 못했다. 일단, 1952년에 체결한 중·일 평화조약에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배상 요구를 포기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다만 이 조약 3조에서 국가간 부채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과 대만이 별도 협상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실제로 협상도 진행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1972년에 일본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면서 이 조약은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일본 정부는 1990년대에 와서 배상했다.
개인적인 차원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는 1952년에 법률을 제정하여 전사자와 부상자들에게 보상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에는 군 연금제도도 부활하여 전쟁 당시 전사자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국가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와 전쟁범죄자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보상의 대상을 일본 국민으로 한정한 '국적조항'이 문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동원되었던 한국인이나 대만인들은 이때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훗날 한국과 대만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개인 소송을 제기한 경우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 국적조항을 비판하고 있다.
Q 이장욱 1970년대 일본과 국교단절 후 개인에 대한 배상과 사과가 어떻게 이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다.
A 차이후이위 먼저 1990년대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소송에서는 인권 침해라는 측면이 주로 부각되었다. 마찬가지로 대만 측도 기본적으로 인도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일본에 배상을 촉구했다. 처음에는 여당인 자민당보다는 야당, 특히 사회당이 관심을 보였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內閣)가 총리에 취임한 후부터는 자민당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다. 가장 액수가 크고 파악하기 쉬운 대만인 복무자들의 봉급과 예금 문제가 먼저 대두했다. 또 대만 측에서도 전쟁부채와 관련하여 전사자와 부상자의 미지급 봉급 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
1983년 1월에 봉급과 저축 문제 해결을 위한 예산 계획 특별규정이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1988년에는 일본 의회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사자 유가족이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1인당 200만 엔을 지급할 것을 결정하였다. 다만 이 액수는 일본인 유가족이나 부상자에게 지급한 것과 비교해보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여서 많은 대만인들이 이중 잣대라고 비난하였다.
1993년 6월에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가 취임한 후, 일본 정부가 최초로 대만에 미지급 부채를 배상할 것이며, 액면가 그대로 배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기준으로 재산정해서 지급하겠다는 뜻을 공식으로 밝혔다. 이후 1994년 3월에는 최초로 일본과 대만 국회의원들 간 협상을 했는데, 공식 외교 관계가 없기 때문에 비공식 모임 형태를 취했다.
그렇지만 배상 문제는 처음 문제 제기가 있은 후부터 약 12년이 지난 1994년 12월에야 최종 마무리됐다. 일본은 대만 측에 지급할 '확정 부채' 총액을 350억 엔으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액면가의 120배에 해당된다. 이 '확정 부채'에는 대만 출신 군인들의 미지급 월급, 우체국에 예치되었던 예금, 대만에서 송금한 해외 민간인 예금, 연금 다섯 가지만 해당한다. 이는 군표, 우체국이 아닌 민간 기관에 예치되었던 예금, 전비 조달을 위해 일본 정부가 식민지 대만인들에게 판매했던 무이자 채권과 예금 상품,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은 배상에 포함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 중 전비 조달 목적의 채권과 예금 상품은 3만 명 이상이 보유했고 액면가가 19억 엔에 달하지만 1994년 배상안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배상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이 현재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식 사과 문제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중국에 공식 사과를 한 것으로 대만 국민에게도 사과한 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만 측은 동의하지 않지만, 사과를 받아낼 것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Q 이장욱 대만에서 배상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왜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A 차이후이위 결정한 후 1995년부터 배상금 지급을 시작하고, 일본 측과 관련 협상도 그때 끝났다. 한편 배상금 외에도 일본은 여러 교류 프로그램이나 교류센터 등을 통해 간접 배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는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한국과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대만은 일본과 1995년에 맺은 협정으로 매년 대만 학생 약 120명을 일본에 교환 학생으로 보내고 있으며, 대만 학자들이 일본에 방문하고 연구할 기회도 제공받고 있다. 이 협정은 2005년에 갱신되어 2015년까지 유효하다.
대만은 일본의 지배가 끝난 후에도 내전과 계엄령을 겪었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거치면서, 대만 사학계는 대만인으로서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더 큰 고민을 하였다. 강제동원 문제는 중요한 현안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Q 이장욱 그렇다면 대만에서는 앞으로 더 이상 강제동원 관련 토론은 없는 것인가?
A 차이후이위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태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대만은 아직 몇몇 단체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만인 일본군'위안부'는 2천~3천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지만, 1천 명 정도가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인정했고, 그중에서 학자들과 인터뷰한 사람은 100명 정도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현재 대만인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는 20명 이하다. 강제동원으로 시야를 넓혀도, 전쟁세대가 고령으로 거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들의 뒤를 잇는 젊은 세대를 보면, 추상적인 지식 몇 가지로 과격한 민족주의 태도를 취하면서 과거사를 보는 사람도 많고 반대로 아예 무관심한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에 보상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대만에서 강제동원 문제는 1990년대만큼 큰 사회 문제가 아니다. 어느 정도 끝난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아직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한국이나 네덜란드와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Q 이장욱 강제동원을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로서 한국의 강제동원 연구자에게 조언을 한다면?
A 차이후이위 정치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확실한 증거에 기반을 두고 연구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기본이 탄탄한 연구를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다. 또, 강제동원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한국 학자들과 해외 연구자들이 교류를 자주 하고,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 공동으로 연구하는 풍토가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