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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백두산정계비 터를 찾아서
  • 제3연구실 연구위원 배 성 준
백두산 쪽에서 본 주차장과 연지봉

당분간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백두산정계비 터 답사는 갑작스레 다가왔다. 2005년 여름 평양 고구려유적 공동조사가 성사되면서 이참에 백두산정계비 터를 답사해 보자는 계획이 잡혔던 것이다. 당시 간도문제가 불거지면서 언론에서 백두산정계비에 관심을 보였지만 백두산정계비 터에 대한 추측만 무성하던 때였다. 손에 쥔 것은 백두산정계비가 표시된 몇 장의 옛날 지도 뿐이었고,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1997년 조선족이 북한쪽으로 백두산을 오르면서 찍은 다큐멘터리에 아주 잠깐 백두산정계비 터가 잡힌 것이 전부였다.

백두산정계비가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비석에 새겨져 있던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구절 때문이다. 1712년 세워질 당시에도 토문강 물줄기가 어느 것인지 논란이 있었고, 1885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회담에서도 토문강이 두만강인가 송화강인가가 양국이 다투던 핵심적 쟁점이었다. 그러나 논란이 되는 구절이 새겨진 백두산정계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통감부간도파출소에 근무하면서 백두산을 답사하였던 시노다 치사쿠에 의하면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7월 28일에서 29일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공동조사팀은 실낱같은 단서에 의지해서 해방 이후 최초로 백두산정계비 터를 ‘발견’하는 임무를 띠고 출발하였다.

공동조사팀은 북경을 거쳐 7월 19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였다. 대동강의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푼 후 평양의 분위기를 느낄 겨를도 없이 다음날 오전 9시 삼지연으로 가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프로펠러 비행기는 처음이라 다소 불안하였지만 1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삼지연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였다. 한적한 시골 기차역 같은 삼지연공항에서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타고 갑산에서 무산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로 나섰다. 동행한 북측 안내원에 의하면 백두산까지 약 한 시간 거리. 지도에서만 보던 신무성 마을과 무두봉을 지나쳐 수목한계선(해발 1900m)에서 잠시 내려 주변 경치를 조망하였다. 남쪽으로는 넓은 평원과 멀리 소백산에 이르는 연봉이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연지봉이 솟아 있어 백두산 봉우리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백두산 아래 주차장까지 갔지만 앞으로가 막막하였다. 오는 도중에도 주차장 부근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과연 백두산정계비 터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기존의 문헌과 정보를 종합하면 백두산정계비 터는 백두산 아래 주차장 근처에 있는 것으로 짐작될 뿐 더이상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목적지로 가는 길 이외에는 접근을 금지하는 이곳에서, 더구나 경비가 삼엄한 국경지역에서 주차장을 벗어나 백두산정계비 터를 찾아 다닌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걱정하던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주차장에 있는 초소 경비병이 백두산정계비 터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하고 초소 경비병에게 물어보니 ‘저기’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백두산정계비 터는 백두산 바로 아래에 있는 주차장의 한쪽 모퉁이에 있었다. 300여 년 간 거센 바람을 견뎌온 백두산정계비 터에는 받침돌과 표석만이 남아 있었다. 비석을 받쳤던 받침돌은 어른 어깨 넓이 만한 상당히 큰 바위이다. 받침돌은 세워질 당시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드러난 것 같았다.

최근 주차장을 확장하면서 받침돌 바로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는 바람에 받침돌의 앞면이 많이 드러나 있었다. 받침돌 바로 뒤에는 백두산정계비 터를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북측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표석은 백두산정계비 자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1980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표석은 높이 45cm 가량 되는 흰색 직사각기둥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각종 문헌과 지도에는 백두산정계비가 위치한 곳을 압록강과 토문강이 발원하는 ‘분수령’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현지에 가보기 전까지는 분수령이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백두산정계비 터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니 ‘분수령’의 의미가 한 눈에 들어왔다. 비석은 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의 골짜기에서 장군봉 쪽으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으로 시야가 시원스레 터져 있었다. 서북쪽으로 장군봉과 향도봉이 올려다 보이고 동남쪽으로 연지봉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동, 서 양쪽으로 시작되는 물줄기의 흔적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서쪽으로는 압록강 물줄기가 시작되는 골짜기가 보였고, 동쪽으로는 평원이 넓게 펼져지고 그 위에 물줄기가 흐른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토문강의 자취였다. 그러나 백두산정계비에서 토문강 물줄기 쪽으로 쌓았다고 하는 돌무더기나 흙무더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바위가 보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쌓은 돌무더기는 아니었다.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약 20분,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약 10분 가량 백두산정계비 터를 둘러보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언제 다시 올 지 기약할 수 없기에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한 장이라도 더 찍고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기 위해서 빨리 버스에 오르라는 북한측 안내원의 말을 무시하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아쉬움은 여전하였다. 오후 2시 경 주차장을 출발하여 압록강 상류를 끼고 내려왔다. 압록강의 차가운 물과 야생화 꽃밭을 뒤로 하고 혁명유적지인 백두산밀영, 사자봉밀영 등을 돌아 저녁 무렵 삼지연의 베개봉호텔에 도착하였다. 긴장된 하루였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