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차원의 학제 간 연구를 시도하다
동북아역사재단은 8월 24~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신냉전의 도래와 문명의 충돌”이란 주제로 <2023 NAHF 포럼>을 개최하였다. NAHF는 동북아역사재단(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영문 표기의 약자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탈냉전 이후 약화되었던 대립과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을 이념적 대립구도의 모호성과 회색지대에 속하는 국가들의 존재, 예를 들어 브릭스(BRICS) 국가들을 들어 ‘신냉전’으로 보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가 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대륙세력과 미국 중심의 해양세력이 충돌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중국의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와 러시아의 유라시아경제연합(Eurasian Economic Union)을 중심으로 대륙세력은 확장하고 있으며,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Free and Open Indo - Pacifi c)’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축사하는 이영호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들의 글로벌 전략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각각 인류운명공동체와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 문명담론을 전파하고 있다. 이들 문명담론은 세계를 어떤 문명관으로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제국담론’ 혹은 ‘지구담론’이라고도 한다. 이들 문명담론은 모두 서구문명을 대신하여 중국문명 혹은 러시아문명이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냉전시기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구별하여 ‘21세기판 제국론’이라도 한다.
2012년 18차 당대회 보고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인류운명공동체 건설을 제안하였다. 이후 인류운명공동체 건설은 시진핑 주석의 핵심사업이 되었다. 시진핑 정부가 인류운명공동체 프로젝트를 실시한 이유는 일대일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인류운명공동체론이 중국의 글로벌 경제 프로젝트인 일대일로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면, 마땅히 현대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운명공동체는 유라시아 주의와 목적과 내용에 있어 많은 공통점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패널 1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의 국제전략과 글로벌 거버넌스 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패널 2에서는 중국의 인류운명공동체, 패널 3에서는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와 그들
의 국제전략과의 상관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학술회의는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추진 중인 문명 프로젝트는 이들 국가의 글로벌 전략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학제 간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2023 NAHF 포럼>에서는 학문의 경계를 넘어 글로벌 차원의 학제 간 연구를 시도해보았다.
포럼에 참가한 외국 전문가들
글로벌 전문가들, 세계문명을 논하다
포럼의 목적과 방향, 내용을 정한 후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고의 전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로벌한 시각에서 국제정치와 문명론의 관계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해 줄 전문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고의 전문가를 찾기 위해 국내외 학자들의 논문을 수없이 읽고, 우리 포럼과의 적합성을 검토하였다. 발표자를 확정한 후에는 일면식도 없는 학자들에게 메일을 보내 취지를 설명하고 포럼에 참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우리의 취지에 공감한 학자들이 초청에 응해주었다.
이번 포럼의 발표와 토론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스웨덴 등 8개국에서 29명의 전문가가 참가하였다. 종합토론 좌장은 윤영관 (전)외교부 장관과 김흥규 아주대
교수가 맡았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두 분은 단순히 문명론에 대한 논의로 그치지 않고, 국제정치와의 관련성 속에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주었다.
이번 포럼의 제목은 “신냉전의 도래와 문명의 충돌”이다. 현재 상황이 신냉전에 해당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번 포럼은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발표자는 현재 국제질서는 중국-러시아 중심의 대륙세력과 미국-일본 중심의 해양세력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으로 판단하였다. 티모시 히스(Timothy R. Heath) 연구원은 “미국과 중국은 아태지역의 안보구조에 대해 중국은 일대일로,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 - 태평양이라는 상충된 비전을 내세우고 있으나, 미국과 중국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각한 취약성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구조에 기여하겠다는 의지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Lankov) 교수는 “중러동맹은 다방면에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시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푸틴 이후 러시아는 서방을 선택할 것이며, 서방은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러시아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진단하였다. 이에 대해 토론자는 시진핑과 푸틴의 장기집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중 · 러 간의 밀월은 계속될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신범식 교수는 “러시아는 중국, 인도, 이란, 튀르키예 등과 대유라시아 연대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넘어 다극화, 다지역 질서의 형성을 추동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학술회의 전경
중국의 인류운명공동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중국은 국내와 국외 투트랙 정책을 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동욱, 우성민 재단 연구위원은 중국 역사학과 역사교육 분야에서 인류운명공동체 담론을 어떠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중국 역사학은 중국의 세계전략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데 동원되고 있으며, 역사교육에서는 ‘중국의(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을 가고 ‘신형 국제관계 건설을 위해 반드시 인류운명공동체를 실현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중국 국내에서 인류운명공동체는 공산당의 집권과 민족주의 강화에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외적인 메시지는 매우 상반된 양상을 보여 중국의 ‘평화’적인 이미지를 전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필자는 마오와 시진핑의 ‘평화’ 외교를 비교한 후에 “인류운명 공동체는 표면적으로 ‘평화’를 설파하나 실제 내용은 ‘가치의 진영화(bloc-ization)’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유표 재단 연구위원은 중국 영화 <유랑지구>의 분석을 통해 “영화에서 인본주의, 공동 영웅주의, 세계적인 연대를 강조하는데, 이는 인류운명공동체의 이념인‘평화’, ‘공존’ 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중국위협론은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팀 윈터(Tim Winter) 교수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은 전략적 목표의 실현을 위해 역사 서술과 문화를 이용하여 ‘공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왕휘 교수는 “중국의 글로벌 거버넌스 전략은 보편성을 결여한 중국 예외주의(Chinese exceptionalism)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수용되기 힘들 것이다”라고 진단하였다.
DMZ 답사 중 영국군 설마리 전투 기념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고 참가자들.
포럼이 끝난 후 38선 돌파기념비, 유엔군 화장장 시설, 영국군 설마리 전투 기념비, 고랑포구, 북한군과 중국군 묘지를
답사하였다.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영국군이 10배가 넘는 중국군에 맞서 싸운 전투다.
이 전투에서 영국의 그로스터 연대는 혈전 끝에 67명만이 탈출할 수 있었으며
59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가 되었다.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도 개념의 확대와 역할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문영 교수는 “러시아에서 제국담론이 러시아 국민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체제 전환 이후 2류 국가로의 추락, 극심한 경제난과 같은 집단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으며, 소련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국 담론은 기억의 정치학의 회로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마크 바신(Mark Bassin)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새로운 공간적 또는 지리적 상상인 대유라시아주의(Greater Eurasia)가 구체화되었으며, 2017년 푸틴은 ‘대유라시아 파트너십’을 촉구한 이후 대유라시아 서사는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유라시아주의와 대 유라시아주의의 차이점은 중국을 포괄하였느냐 여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진석 교수는 “알렉산드르 두긴이 말한 ‘보편제국’은 ‘지구제국’으로, 유라시아 변경지대의 여러 국가들과 연대의 축을 맺어 해양세에 대항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러시아가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제국은 궁극적으로 세계적인 제국이다”라고 하였다. 미하일 수슬로프(Mikhail Suslov) 교수는 “2014년 시작된 ‘러시아 세계 프로젝트(Russian World project)’는 러시아의 영토성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상상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러시아 문명의 일부로써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반도를 되찾아야 한다는 등의 실지회복주의적 해석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라승도 교수는 “러시아는 ‘러시아 세계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해 2010년대 시리아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활동한 러시아 군인들의 활동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여, 러시아 군대의 주둔 명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테러와의 전쟁에서 서구에 대한 러시아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중국과 러시아가 추진 중인 인류운명공동체와 대유라시아주의는 내용과 목적에 있어 매우 유사하다. 우선, 고전적 제국이 일국의 노력으로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면, 현재는 다른 나라와 연대를 통해 ‘지구제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이 거대한 통합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공동체의 리더는 중국 혹은 러시아다. 자신들은 우수한 ‘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메시아적 사명을 강조한다.
이들 두 국가 외에도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튀르키예, 몽골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인도는 ‘세계의 선생님(vishwaguru)’을 자처하며 마우삼 프로젝트(Projct Mausam)를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인도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과 유사한 ‘면화길(Cotton Route)’을 추진 중이며, 인도네시아는 ‘향신료 길(Spice Rout)’을 추진 중이다. 제국 경영의 경험을 가진 국가들이 ‘공동의 역사 기억’을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통합하는 과정에 한국과 같은 중견국들은 여러지역에서 문명국가와 역사, 문화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시진핑 정부 이후 한중 간 역사, 문화 갈등은 한국사 전반, 문화원조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논쟁의 범위가 확대되고 공세가 강화된 것은 시진핑 정부의 인류운명공동체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 인류운명공동체의 이념적 배경은 마르크스주의와 천하관이다. 천하관이 국제정치에 반영된 것이 천하질서고, 천하질서는 조공과 책봉으로 구체화되었다. 중국의 인류운명공동체 프로젝트 추진은 한국과 역사, 문화 논쟁을 가열시켰다. 향후 유라시아 각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국담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들 제국담론이 국가 간의 역사, 문화 갈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유라시아 국가들은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창작한 '〈2023 NAHF 포럼〉 “신냉전의 도래와 문명의 충돌” 개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