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그리고 한성기와 웅진기의 백제
한강 유역은 한반도 중부를 가로지르는 교통로이자 광활한 평야를 품은 곡창지대다. 또 중국과 교통하는 출발지로서의 중요성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국가 흥망의 배경이 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는 한강 유역에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금강 유역의 공주에 538년까지, 부여에 660년까지 도읍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한성기, 웅진기, 사비기로 나누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396년에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백제 왕성을 공격했으며 장수왕은 475년에 한성을 공함하고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사료에 의하면, 백제 성왕이 신라 등과 함께 551년에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475년부터 551년까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이 든다.
고구려의 관방과 교통로
고구려는 산성이나 보루 등 관방(關防)으로 구성된 개별 방어망을 형성했고 지방행정 조직과 일치하는 군사조직을 통해 정복 과정에서 확장한 영토에 대한 지배를 꾀했다. 고구려의 주요 거점은 이동과 적과의 대응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는 주요 교통로상에 구축됐다. 그러므로 강과 하천, 지천 주변에 형성된 자연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할 수 있다.
한강 유역 고구려 보루와 고분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은 아차산 일대에 집중돼 있다. 동쪽의 왕숙천과 서쪽의 중랑천을 벗어나지 않으며, 남쪽의 한강과 그 주변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감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임진강 유역에는 호로고루나 은대리성, 당포성과 같은 중·대형의 규모를 가진 평지성이 많다. 하지만 한강 유역에는 둘레 300m 이내의 소규모 군사요새인 보루들이 대부분이다.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는 아차산 정상부에서 이어지는 주능선과 같은 산줄기인 용마산과 홍련봉, 시루봉, 봉화산 등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17개소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홍련봉보루 막새(좌), 호로고루막새
이중 아차산 3·4보루, 용마산 2보루, 홍련봉 1·2보루, 시루봉보루, 구의동보루 등이 발굴됐다. 유구로는 성벽, 치성, 건물지(주거지), 온돌시설, 저수시설, 배수로 등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기타 시설은 대장간, 단야시설, 방앗간, 토기가마, 소성유구 등이 있다.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에서는 거점성과 같은 큰 규모의 산성이나 평지성이 축성되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보루는 현재 비무장지대와 주변의 GP(Guard Post)나 GOP(General Outpost)처럼 소규모 군사시설의 성격이 강하다. 내외 시설도 최소한의 필수 조건만 갖추고 생활한다. 따라서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고 이러한 전투 과정에서 보루 점령의 주체가 달라지는 것은 자명하다. 어느 한때 고구려에게는 최전방 요새이자, 백제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입지이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수 차례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을 쉽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아차산을 오르면서 당시를 생각하면 긴장감이 밀려든다. 결국 계속 점유되는 항구성보다는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임시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외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은 몽촌토성 내 적심건물지와 판축대지, 온돌건물지, 고구려 기와가 바닥에 시설된 가락동 5호분, 탄천 주변의 용인 보정동·동천동·어비리 고분과 성남 판교동 고분, 고구려계 토기가 수습된 용인 마북동 유적과 원주 건등리 주거지, 충주 탑평리유적 1호 백제 주거지 상부 출토 고구려계 토기, 충주 두정리고분 6기, 충주 단월동 5호분과 10호분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경우 한 유적당 보통 1∼2기가 대부분이며 충주 두정리 고분만 6기가 횡으로 배치돼 있다.
한강 유역 고구려 고분
홍련봉 1보루 출토 고구려 수막새의 의미
홍련봉 1보루에서는 아차산 일대의 보루 중 유일하게 기와가 출토돼 주목받았다. 기와류는 적색과 회색의 새끼줄무늬[繩文] 평기와가 주류를 이룬다. 또 연화문 수막새는 한강유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인데 임진강 유역에서는 호로고루에서만 검출됐다.
『구당서』 동이전 고려조에는 “대부분 볏단으로 지붕을 얹었으나, 불교사원과 신묘, 왕궁, 관청은 기와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기와가 국가 관련 조영물인 왕궁과 관청 사원과 신묘 등 특별한 건물에만 사용됐음을 알려준다. 그만큼 기와는 건물 자체의 존엄성과 장식성을 통해 계층적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축 부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가 출토된 홍련봉 1보루와 호로고루는 위계가 높은 유적이 된다. 또한 이들 유적에서는 수막새의 주연부를 훼손해 폐기[毁棄]하는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동맹제의와 유사한 의례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즉 홍련봉 1보루와 호로고루는 군사적인 기능과 함께 의례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도 부각될 필요가 있다.
475~551년 한강 유역의 주인은?
475~551년까지 한강 유역의 영유국은 어디였을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고구려 영유설’이 대세처럼
보인다. 고고자료의 편중과 그 해석 때문일까? 반문한다.
발굴자는 홍련봉 2보루 출토 ‘경자(庚子)’명 토기를 가지고 520년으로 설정해 고구려 영유설을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경자가 아닌 ‘호자(虎子)’로 읽히기도 한다. 아차산 4보루의 사례를 보더라도 ‘염모형(牟兄)’, ‘지도형(支都兄)’ 등 인명이 대부분이다. 이는 개인용 배식기이기 때문이다. 이외 토기에 간지(干支)를 새긴 예는 없다. 이것이 ‘고구려 영유설’을 확증하는 문자자료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따라서 ‘백제 영유설’, ‘동성왕 또는 무령왕대 회복설’, ‘성왕대 상실설’ 등 다양한 견해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특히 529년 황해도 오곡 전투에서 패한 후 551년에 한강 유역을 다시 회복했다는 ‘성왕대 상실설’이 눈여겨 볼만하다.
성곽의 일반적인 특성 중 하나가 연용(連用)이다. 즉 시기별로 주체를 달리하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하듯 『수서』 백제전에 “신라, 고구려, 왜인 등이 섞여 사는데 역시 중국인도 있다”는 기록과 같이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을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한강 유역 고구려 유적(항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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