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이름들, 그리고 냉전의 대리전
‘6.25전쟁’,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 ‘조선전쟁’, 그리고 ‘잊혀진 전쟁’까지. 한국전쟁은 그 전쟁을 바라보는, 혹은 전쟁에 임했던 입장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1950년 10월 중국이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며 전쟁에 참여하면서 한국전쟁은 더이상 남북한만의 갈등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구조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진영을 지키기 위한 견제로 이어졌고, 중국의 참전은 ‘지원’의 형식으로 사실상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전쟁이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냉전의 대리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 개시 이후 북한군에 의해 한국군이 부산까지 밀려갔던 것은 미군의 한국 진입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서울 수복 이후 중국군에 의해 다시 후퇴하는 양상은 미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미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이를 용인할 수 없어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다. 이미 일본에 대한 핵폭탄 투하로 핵무기가 가져올 파급력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 핵무기를 도입한다는 것은 그 전장이 자국이 아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군부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던 행정부에 의해 제한되었고, 미국은 한국전쟁에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과 군사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에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소련의 제안과 미국, 북한, 중국의 동의로 정전협정이 시작됐다. 이때 한국은 미국과의 상호안전보장을 주장하며 정전협정에 반대했고, 전쟁 참여국 중 유일하게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대한 국제적 시각이 드러난 제네바 회담
정전협정은 한반도에서의 대립을 평화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다. 분단선이 존재하는 한 한반도 내 두 국가의 운영은 정전협정의 규정 아래 전개된다. 이에 정전 이후의 한반도를 이해할 때 ‘정전체제’를 전제하기도 한다. 중립국감시위원단, 군사정전위원회, JSA경비대는 분단을 둘러싼 의제를 관리하는 주체가 됐다. 전쟁이 국제화됐던 만큼 전후 역시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의결에 따라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에도 남북관계 관련 문제를 논의할 때 3자회담, 6자회담 등의 형태가 언급되는 것이다.
국제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은 전후 한국 분단 관련 의제를 관리하며 사회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전후에도 외국이 한국 사회에 개입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정전이 종전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국제적 이해관계가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각국은 한국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을까. 이는 정전협정의 규정에 따라 개최됐던 정치회담인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네바 회담은 물리적인 투쟁을 정지하고 전쟁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의 장으로서 그 방식에 관한 각국의 입장이 제시되고, 궁극적으로는 전쟁에 대한 각국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사실 제네바 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3개월 이내에 개최돼야 했지만, 참가국 문제로 인한 의견 대립 등으로 예정보다 늦은 1954년 4월 개최됐다. 참가국은 실질적으로 정전협정에 조인했던 중국, 미국, 북한 외에도 남한과 소련, 전쟁에 참여했던 연합국 국가들이 포함됐다. 다만 이 당시 제네바 회담의 주요 이슈는 한국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전개됐던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전쟁 관련 의제가 더욱 주목됐고, 이는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으로 만들었다. 제네바 회담은 절차적이나마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였다. 하지만 참여국의 입장 차이와 상호 간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을 제시하는 등 회담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제네바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는 변영태 외무부장관 일행과 회담 참가증명서
한국: 무력을 통한 종결 주장
한국은 회담 개최 8일 전까지도 참여를 거부하다가 미국과 협의해 한국군 증강에 대한 미국의 원조 약속을 받고 참여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는 제네바 회담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및 그 목적에 대한 동의는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할 경우를 전제하며 “만약 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 무익하며 위험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남한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내몰 것”이라고 회담 참가의 의의를 설명하기도 했다. 협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하기 위해 참여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데에 의지가 없었다는 것은 그들의 의제에서도 드러난다. 즉 유엔 감시 아래 북한만의 자유선거 실시, 선거 전에 중국군의 철수 등 공산 측의 일방적인 양보만을 주장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제네바 회담이 성과없이 끝난 이후 미 의회 연설에서 휴전의 종결과 전쟁 재개를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 국제적 개입 제한 및 남북한 선거
북한은 역시 남한의 제안에 반대하며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와 남한의 국회 대표, 남북의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전조선위원회’를 제안했다. 이를 기반으로 총선거법 초안을 만들고, 남북 간 경제·문화교류를 증진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중 양군 철수와 더불어 외국은 한반도의 평화적 발전과 통일을 보장한다는 데에 합의하라는 제안을 했다. 회담이 종결될 즈음 북한은 최종 합의안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외국과의 방위조약 폐기와 같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외국의 개입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됐다. 이와 더불어 남북 군대의 10만 명 이하로 감축 등 군축의 언급도 있었다.
미국: 분단의 유지와 중국 견제
미국 역시 ‘제네바 회담’을 통해 정전을 해소하고자 하는 의지는 낮았다. 냉전적 세력 균형과 동북아에서 대중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바 회담에서 합의를 결정하는 것은 국공내전 승리 이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한 중국의 위상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제네바 회담에 중국이 참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회담 기간 중에도 가능하면 중국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한에 회담 참여를 설득했다. 회담이 실패한 후에 그 결렬의 책임이 전쟁 주체인 한국을 참여시키지 않은 미국에 돌아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다만 남한이 중국만 철수할 것을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군이 철수한다면 그 이후 유엔군도 철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위기상황이 다시 발생한다면, 지리적 거리상 중국군은 재빨리 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고, 유엔군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제안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미국은 최종적으로 세가지 안을 제시했다. 이는 한국 정부를 중심으로 한 북한정부 흡수, 보통선거를 통한 새로운 입법부와 행정부 구성, 그리고 남북 총선거로 국가와 정부를 구성할 제헌회의 대표 선출이었다. 하지만 이미 북한 역시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대안으로서 공산진영이 수용할 수 없는 안이었다.
1950. 7. 7.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의 한국 파병 안을 7대 1로 통과시키고 있다.
중국: 국제적 지위와 아시아에서의 세력 확보
중국은 제네바 회담에 사활적으로 참여했는데, 국제적 지위 격상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복구를 위한 대외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평화공존론’에 반영됐는데, 미국의 의제를 ‘아시아인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전략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응하여 평화를 의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은 평화를 내세우는 중국의 대외전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데에 제네바 회담을 활용했다. 중국은 양군 동시 철수를 주장하며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형성된 공격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고자 했고, ‘평화공존론’으로 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갖는 패권확장 관련 우려도 완화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평화공존 전략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연대를 분리하고자 했다. 즉, 유럽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유럽이 미국의 대중봉쇄에 협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유럽국가들의 이해관계에도 적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국가들이 전후복구와 국내 경제발전에 집중할 때 중국과의 무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합국: 국가 간 세력 견제
연합국 내부의 입장 차이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국은 한반도 통일방안 논의가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이라고 판단했고, 한반도의 분단을 유지하며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유지론의 기반에는 미국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회담에 미국의 의견과 달리하는 인도의 참여를 주장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원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양군 동시 철수를 주장하며, 한국이 양보하는 형태를 띠더라도 전체 한반도 선거를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리핀은 남북대표로 ‘헌법 제정회의’를 만들어 통일방안을 연구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잊혀진 전쟁과 남겨진 정전
제네바 회담 중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제네바 회담 참가국들의 관심은 한반도 문제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결국, 미국은 제네바 회담을 중단시키기로 결정했다. 북한이 제의했던 최종안은 미국이 반대하며 결렬됐고, 1954년 6월 15일, 회담은 아무런 결론 없이 종결됐다. 의제는 빠르게 인도차이나 문제로 넘어갔고, 한국전쟁은 잊혀졌다. 국가 간 이해관계가 적용되며 냉전의 대리전이 치러졌던 전장으로서의 한반도에는 파괴된 공간과 경제 재건 문제, 실업자가 된 군인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등의 과제가 남겨졌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닿을 수 없고, 평시임에도 끊임없이 위기를 인식해야 하는 ‘정전체제’는 한반도 사회 전체에 항시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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