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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외교문서로 본 한일관계
한일 청구권 협정 연합국 일원에서 배제된 한국, 일본과 개별 협정
  • 조윤수,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민간인(김태성)등]의 대일 청구권 해결문제, 1955-65[민간인(김태성)등]의 대일 청구권 해결문제 02[민간인(김태성)등]의 대일 청구권 해결문제 03


對日 배상 요구가 아닌 청구권 교섭

일본 기업 미쓰비시三菱는 왜 미국과 중국에는 사죄하면서 가장 피해를 많이 준 한국에는 입을 꾹 다무는 것일까? 1945815, 한국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지거나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학대를 당했던 독립운동가들,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수많은 피해자와 물적 피해에 대한 일본의 배상과 사죄는 한국인에게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는 국제사회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대부분의 연합국은 여전히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이다.


패전 후 일본은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배상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강화조약에 참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물론 한·일 양국 간 협상을 통해 배상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본이 1910년 강제병합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은 일본의 불법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국제법상 국가 분리에 따른 청구권 교섭으로 진행하게 됐다.


 

개인청구권, 다뤄진 것과 다루지 않은 것

청구권 교섭은 한국이 제안한 대일 8항목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협상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는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한 금과 은의 반환 청구 194589일 및 그 이후 일본의 대 조선총독부 채무의 변제 청구 194589일 이후 대한민국에서 이체 또는 송금된 금액의 반환 청구 194589일 현재 대한민국에 본점 주사무소가 있는 법인의 일본 내 재산의 반환 청구 대한민국 법인 또는 자연인의 일본 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 위에 언급하지 않은 것은 회담 성립 후 개별적으로 행사할 수 있음을 인정할 것 위의 재산, 청구권에서 발생한 과실의 반환 청구 위에 요청한 반환 및 결제는 협정 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6개월 이내에 완료할 것 등이다. 개인 청구권에 해당하는 것이 5번과 6번 항목이다.


개인 청구권 문제는 주로 6차 회담에서 다루었다. 군인 군속 등의 미수금, 은급(연금)에 대한 한일 양국의 태도는 달랐다. 일본 정부는 피징용자에 대한 미불금과 은급을 개인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청구하고 추후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주장했다. 개인에게 직접 지급할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우리 정부의 요구 금액이 잘 지급됐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일 양국은 정치적 타결이라는 해결책을 선택했다.


국내에서는 개인의 청구권을 해결해달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인에게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한 사람, 월급을 받지 못한 사람, 군인 중에 군표가 소각되어 피해를 본 사람,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저금을 했으나 찾을 길이 없는 사람, 보험금 지급을 받지 못한 사람, 일본인 회사의 주식 보유자의 권리 문제 등 피해 범위가 넓고 다양했다. 한 예로 김태성은 일본 총영사관의 의뢰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군인, 군속, 정신대)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경비를 지급했으나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제안한 6번 항목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모든 청구권 문제를 교섭에서 다룰 수 없고,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7차 회담에서 청구권 협정의 조문 교섭을 앞두고 청구권이 무엇인지, 손해배상의 개념이 청구권에 포함되는지, 3국 거주 한국인의 재산 청구권은 어떻게 소멸되는지 등을 법률적으로 검토했다. 이는 7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청구권의 정의와 범위조차 확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협정 과정에서 눈감은 북한 내 일본 자산 문제

한일 청구권 교섭의 변수는 북한이었다.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는 한국의 관할권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기본관계조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일본은 한국의 관할권이 38선 이남에만 미친다고 해석했다. 이는 일본이 북한과의 교섭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미군정 33호에 따라 이루어진 일본()의 재산 몰수는 남한 지역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북한의 대일 청구권 문제는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에는 한반도에 재산을 남겨두고 돌아간 일본인들이 재산을 돌려달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곳에 남겨진 일본인의 사유재산은 국제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북한 지역에 있는 자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형태로 협정을 체결하면, 북한 지역의 일본인 사유재산은 일본 정부가 보상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시정권이 미치지 않는 38선 이북 지역을 미해결 상태로 두고자 했다.


북한 문제는 청구권 교섭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과 한국이 모두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와 국·공립기관의 재산을 한국과의 협상만으로 처분하는 것은 일본 정부에 커다란 부담이었다. 한국은 북한 문제에 매우 민감했다. 한국 대표단은 일본이 북한 정부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 협상을 중단하겠다고까지 했다. 회담에 참석한 일본인은 북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교섭에서 암묵적으로 금기되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이라는 복잡한 변수 때문에 한일회담 초기부터 정치적 타결을 염두에 두었다.



 

남은 과제 북일 교섭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한일청구권협정은 매우 미흡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한일협정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시각에서 불만족스러운 협정이라도 한국 정부가 체결한 조약인 만큼 이를 무력화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지위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피해자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국제법 해석도 바뀌었다. 한국 정부는 한일회담 당시 북한과 일본의 교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했으나, 지금은 북·일 교섭을 지지한다. 한일청구권협정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문제들이, ·일 교섭에서 어떻게 논의될지도 학계의 큰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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