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16일 자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실린 독도 사건 화보.
독도 전경, 사망자의 시신, 부상자들, 기총 탄환에 관통된 가방, 독도로 간 구호선을 기다리는 울릉도 주민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지난 6월 8일, 1948년 독도폭격사건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독도에서 열렸다. 그 전날에는 ‘독도6·8사건 추모 사업의 과제와 방향’이라는 주제로 울릉도에서 전문가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유족들은 여전히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아픔을 위로하며 그날을 기억하고자 애쓴다. 2000년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에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었지만, 인명과 선박 피해 및 배상 현황, 기관총 사격 여부, 독도 폭격 연습장 지정 경위 등에 대한 의혹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필자는 그러한 의혹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이 사건이 독도 영유권에 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2018년 재단 기획 연구로 ‘독도폭격사건에 관한 실증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 편의 논문 「1948년 독도폭격사건의 인명 및 선박 피해 현황」을 집필하고, 한 권의 자료총서 『광복 후 독도와 언론 보도 1: 1948년 독도폭격사건』을 출간할 수 있었다. 당시 정리한 내용을 기초로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할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광복 후 독도에 관한 최대의 사건
독도폭격사건은 광복 후 독도에 관한 최대 사건이다. 1948년 6월 8일 사건 당일 12시 경 미군 정찰기 1대, B-29폭격기 20대가 독도 상공에서 76개의 폭탄(454㎏)을 투하하였다. 오키나와에 기지를 둔 미 공군 폭격기들이 폭격 연습을 한 것이다. 독도는 1947년 9월 연합국최고사령관 각서SCAPIN 제1778호에 의해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어민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조업을 하다 변을 당했다. 그 사고로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최소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3구의 시신만 수습되었을 뿐, 나머지는 폭탄에 찢기고 파도에 휩쓸려 모두 행방불명 되었다. 선박도 14척이나 파손되거나 침몰하였다.
당시 울릉도에는 서울 등지에서 온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 사건 소식이 순식간에 울릉도 밖으로 퍼졌다. 6월 11일 첫 보도 이후 7월 말까지의 국내외 기사는 480여 건이 넘었다. 거의 모든 국내 신문을 비롯하여 로이터, UP 등 해외 통신사도 이 소식을 전하였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신문도 이 사건을 수 차례 다루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1950년대 중반 이후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사실관계마저 잘못 알려졌다.
사건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단절
1995년 한국외대 동아리 독도문제연구회와 울릉도 시민단체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가 울릉도 거주 폭격사건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알리면서 세상이 다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부는 독도로 특별 조사단을 급파하여 한미 합동 조사 및 구조 활동을 벌였다. 또한, 소청위원회를 조직하여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였다. 일본에 있던 극동공군사령부는 현장 사진과 작전 보고서를 기초로 ‘23,000피트(7,000m) 상공에서 연습탄을 투하하였는데 어선을 바위로 오인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하였다. 이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미 군정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다. 당시 미 군정은 이 사건이 국내 정세와 미군에 미칠 영향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조속히 매듭지으려 했다. 간략한 성명 발표 외에 사건의 경위와 사실관계에 대해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록은 1948년 국내외 언론 보도와 국회 회의록, 1951년과 1952년 경상북도지사 보고서 등에 있다. 당시 미군이 작성한 기록은 언론 보도와 몇 개의 전문, 그리고 「제93중폭격비행단의 1948년 6월 역사」 외에는 발굴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보다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미군 측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그 자료들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나 앨라배마주(몽고메리) 미공군역사연구소AFHRA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기관의 관련 자료는 비공개로 되어 있거나 한국 연구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재미 학자들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독도의 나리꽃 군락
ⓒ안동립
우리 국민의 삶의 터전, 독도
이 사건은 분명 비극이지만, 독도가 우리 국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실증한 사건이기도 하다. 사건 당시 독도에서는 우리 어민 59명이 어선 18척에 분승하여 조업을 하고 있었다. 강원도, 경상북도 어민이 37명, 울릉도 어민이 22명이었다. 그중 강원도(당시 울진 포함) 주민 8명, 울릉도 주민 6명이 사망하였다. 1948년 독도는 울릉도 어민뿐 아니라 강원도 등지의 육지인도 이용하는 어장이었다. 그리고 사망자 중 울진군 온양리 주민의 제적부除籍簿에는 “단기 4281년 6월 8일 오전 11시경 경상북도 울릉도 소속 독도 동東 약 300미돌米突(미터) 해리海里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제적부는 미군정 시대에 작성된 행정 문서로 독도가 경상북도 울릉도 소속 곧, 한국의 관할 영역임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독도가 한국의 관할하에 있었다는 것은 사건 직후 주한미군 특별조사단이 독도에 파견되어 구조 및 조사 활동을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에는 경상북도지사와 포항 해군경비부 사령관 등 관민 7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제막식을 거행한 일도 있었다.
사건에 주목해야 할 이유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7년 4월 이후, 일제 강점의 기억이 생생하던 때 일본 측에서 독도를 자기네 어장이라고 주장하며 독도 영해를 침범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1947년 8월 과도정부는 대규모 학술 조사단을 독도 현지로 파견하였다. 그런 시국에 독도에서 폭격사건이 일어나 선량한 어민들이 다수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되풀이되는 일본의 독도 도발과 더불어 독도폭격사건은 독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더욱더 깊게 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독도 도발을 되풀이하며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그런데 독도폭격사건은 독도를 ‘한일 간 대립’이 아니라 ‘평화와 인권’의 시각에서, 즉 ‘대립’이 아니라 ‘지향’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상들이 땀과 피를 흘리며 삶의 터전으로 일군 독도를 어떻게 가꾸어나갈 것인지, 다시는 이런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케 한다. 나아가 평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독도를 활용할 방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독도폭격사건의 진상 규명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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