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성,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인권소위 부의장,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및 인권센터 소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인권상 홍조근정훈장, 삼성 여성선도상을 받았다. 한국인권학회, 한국사회학회,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거치며 『일본군 성노예제』, 『인권으로 읽는 동아시아』,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근현대사』, 『유엔과 인권규범의 형성』, 『재일동포』 등 여성 인권, 한일관계, 탈식민 역사와 관련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1990년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일본군 성노예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 채택과 같은 큰 성과를 이뤘다. 2000년에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여성국제법정’)은 일본군 성노예제의 범죄성에 대해 체계적인 국제법적 판단을 시도한 실험 무대이자 초국적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을 종합한 장이었다. 이 ‘여성국제법정’을 이끌고 일본군 성노예제를 알리는 데 앞장선 이가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다. 그를 만나 ‘여성국제법정’의 배경과 준비 과정, 결실과 한계, 앞으로의 연구와 운동 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대담 |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Q1.‘여성국제법정’이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당시 한국 측 부위원장으로서 감회가 어떠신지요?
지난 20년간 일본군 성노예제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을 보면 과거보다 퇴행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에 반해 한 가지 이슈로만 30년 이상 운동을 지속해 온 시민단체의 면면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어쩌면 이런 모순이 공존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아직도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법적인 문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 요구 등이 지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여성국제법정’ 이후 학자, 법률가, 교사, 학생, 전 세계 시민사회에까지 운동이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Q2.‘여성국제법정’의 배경, 개최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성운동은 계속 성장해 왔습니다.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로 이 문제를 가져간 건 일본 정부에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구舊 유고 지역 등에서 이루어진 강간 등 전시 하 여성 폭력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어서 우리의 문제 제기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죠. 더욱이 일본과 미국 법정에서의 경험과, 유엔·국제노동기구 등 국제기구의 권고 및 국제NGO의 국제법적 판단이 축적되어 있었고, 전 세계 시민단체와의 국제 연대에 대한 자신감을 기반으로 법정의 개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국제법률가협회는 한국, 북한, 일본, 필리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관련 인물을 조사해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하고 치밀하게 분석했어요.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 특별보고관의 보고서는 일본군‘위안부’를 전시 하 군대 성노예제로 규정했고,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게이 맥두걸Gay J. McDougall 특별보고관의 보고서에는 일본 정부에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책임을 묻는 내용이 포함됐어요. 하지만 이런 판단이나 권고만으로는 일본을 움직일 수 없었어요. 결국, 국제법적 해석의 축적과 문제 해결의 좌절이라는 모순 속에서 아시아 피해국 여성들은 제5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여성국제법정’ 개최를 결의하게 됩니다. 1967년 러셀 베트남 전범 법정Russell Tribunal을 모델로 삼은 이 법정은, 기소를 위해 활동가 및 여성학자, 사회학자는 물론 국제법 학자와 역사학자들을 운동에 합류하도록 했고, 일반 시민뿐 아니라 대학생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확산시켰습니다.
Q3.‘여성국제법정’ 진행 과정에서 떠오른 쟁점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여성국제법정’은 처음부터 쟁점투성이였어요. 개최 장소로는 서울과 도쿄가 논의됐어요. 한국이 피해자가 가장 많은 나라고, 앞으로도 이 운동의 확산이 필요한 곳이라는 점, 일본군 성노예제의 식민지성을 부각해야 한다는 점이 서울을 후보지로 삼은 이유였죠.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도쿄에서 열린 극동전범재판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개최지는 도쿄가 되어야 한다는 일본의 설득에 넘어갔어요. 이것이 가장 첫 번째 쟁점이었습니다.
다음 쟁점은 공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국제법정의 형식성을 갖추는 문제였습니다. 법정의 권위와 엄격함을 내세울 것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열린 법정을 만들 것인가를 두고 한참을 논의했습니다. 재판장으로는 구 유고 국제전범재판소 판사였던 가브리엘 맥도널드Gabrielle Kirk McDonald를 모셨는데, 법정이 열리기 전날 “이 법정은 모의법정이 아니라 실제 재판처럼 진지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형식성을 강조해서 혹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판결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고 법적인 권위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요.
그리고 이 법정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은 ‘개인’ 책임 부분에 히로히토 일왕을 넣어 기소하는 문제였습니다. 히로히토가 일본에서 신적인 존재임을 고려하면 기소하기 어렵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윤정옥 선생님이 이 문제의 최고 책임자를 제외하면 법정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셔서 결국 히로히토를 기소하기로 했습니다.
Q4.‘여성국제법정’으로 해소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은 일본군 성노예제를 전시 하 여성 폭력 문제로 한정 지었다는 것입니다. 준비 과정에서 식민지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논의가 진전되지는 않았어요. 모든 아시아 국가가 우리와 같은 입장은 아니었으니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깊게 들어가지 못한 것이 분명한 한계였습니다. 당시에 식민지 문제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했어야 했는데 또다시 과제로 남기고 말았다는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몇몇 일본 정치인들은 여성을 폭행하거나 협박해서 강제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모집한 증거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네덜란드 정부기록물보존소에서 찾은 일본 해군의 ‘위안부’ 강제 연행과 성폭력에 대한 보고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문서 등 수많은 자료가 있죠. 하지만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을 뛰어넘어,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지배, 제국주의 전쟁에 여성을 강제동원하여 자행한 범죄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Q5.‘여성국제법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면?
‘여성국제법정’ 준비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남북공동기소와 재일동포의 협력이었습니다. 이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남북 화합과 민족적 단합이 이뤄낸 중대한 결실입니다. 재일동포나 일본 내 단체를 통해서만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는 한계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상호 연락의 어려움 때문에 법정 개최 이틀 전에서야 남북이 처음 만났으니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기소장 내용을 논의하고, 각자 준비한 자료를 점검하고, 조금씩 양보하며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위안소 범죄와 일본의 국가 책임을 강조하는 강경한 발언을 이어나간 것은 일본군 성노예제의 발생 원인을 일제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 속에는 남북공동기소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까지의 과정과 감격스러운 순간들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실질적인 일본군 최고 통수권자이자 의사결정권자로서 부하들에게 국제법 준수와 성폭력 중단을 명령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결국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하에 일어난 잔학행위를 묵인했다는 점에서 명령 책임에 근거한 유죄 판결을 받았지요. 그리고 일본 정부는 1907년 헤이그조약, 1921년 여성과아동매매금지조약, 1930년 국제노동기구 강제노동금지조약 위반으로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권고받았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북한,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동티모르에서 참석한 10개 지역 피해 여성들이 서로 얼싸안고 울며 만세를 불렀죠. 20년 전 그 장면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Q6.그렇다면 ‘여성국제법정’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먼저, 유죄 판결의 기준이 되는 기본원칙을 확립했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기반으로 사실에 기초하고, 범죄 발생 당시의 법에 근거하여 법적 판단을 내린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여성국제법정’의 판결은 이미 판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형식성만 갖춘 법정이 아니었고, 결과 역시도 허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990년대 여성운동은 여성 중심으로 조직하고 여성 주도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하지만 ‘여성국제법정’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던 남성 전문가도 대거 참여했지요. 법률전문위원회를 만들어 김창록, 박원순, 장완익, 조시현 선생 등의 국제법 학자와 법률 전문가를 영입했고, 진상조사연구위원회를 조직해서 강만길, 이만열 선생 등 역사학자의 도움도 구했습니다. 대학생을 포함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국내 운동을 확산한 것도 큰 결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Q7.유엔에서 활동하시면서 ‘여성국제법정’의 성과를 체감한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다면요?
실제로 그 영향을 체감한 적은 없습니다만 이 법정에 참여했던 과테말라, 말레이시아 등지의 활동가들이 후에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난 전시 성폭력 민간법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노력해온 일본군‘위안부’ 결의가 2007년 미국 하원을 통과하고, 정대협을 중심으로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헌법소원을 통해 2011년 우리 정부의 부작위 위헌 판결을 이끌어내지 않았습니까? 정부의 태도 변화를 견인하고, 국가 간 관계를 변화시키고, 사회적 관심을 고조시켜서 시민사회가 활성화된 것을 성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국제법정’을 계승해서 탈식민주의를 이루어 가는 현재의 과정도 이 법정의 공로라고 봅니다.
Q8.‘여성국제법정’이 제시한 문제 해결 방식을 실천할 구체적인 방법과, 일본군 성노예제 운동의 미래는 어떠해야 할지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관련 연구는 너무 세분되어 있어요. 사회학, 법학, 사학, 인류학, 여성학, 정치외교학, 기록학 등과 같은 개별 영역이 이뤄낸 결과는 굉장히 훌륭한데, 이것이 연결되어야만 큰 시각에서 주제와 대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학문에 따라 연구 범위와 강조점이 다르거든요. 연구가 체계성을 띠고, 열려있고, 환류되어야 하는 이유죠. 우리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이기도 합니다.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문서, 이미지, 소장품 같은 역사 자료를 계속 발굴하고, 기간·주제·인물별로 정리하고 종합해서 아카이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기관이, 어떤 자료를 얼마나 가지고 있나를 정확히 파악해 서로 연결시켜야 해요. 그러면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자료를 쉽게 검색해서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일본군 성노예제의 역사적 진실 규명과 관련 연구가 발전하게 될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한일관계로 좁혀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오히려 우리가 그 부분을 극복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성 인권’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 문제의 아시아적 맥락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탈식민’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는 지혜를 모아 아시아에서 탈식민화와 여성 인권과 평화 가치 증진을 주도해야 합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연구와 운동의 지난 30년간의 경험을 딛고, 아시아 곳곳에서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무력 갈등 하 여성 폭력에 대해 조사·연구·구제하는 선도적 활동을 시작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희망적인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회피하려 했던 사회 분위기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통스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극복하여, 여성 인권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아시아에서 이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일본군 성노예제 운동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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