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닷새 동안 일본 도쿄에서 국제적 민중법정인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일본군 성노예제 범죄의 불처벌 역사를 반성하고 평화와 여성 인권 관점의 새로운 천년을 열겠다는 의지의 장이었다.
(사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소장)
올해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여성국제법정’)을 개최한 지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2000년 12월 8일, 일본의 전쟁범죄 가해자가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신사에서 가까운 곳인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열린 전범 재판에서 일본군‘위안부’ 범죄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와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 새로운 21세기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의 장이었다.
‘여성국제법정’ 최종 판결문 표지
(2001년 12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
일왕을 비롯한 10명의 피고인에게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는 유죄 판결을 내렸다
(출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판결문: 히로히토 유죄』, 정대협).
‘여성국제법정’이후 20년, 그 의미를 다시 묻는다
‘여성국제법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중 법정이었다. 법정의 권한이 국가기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민중, 나아가 전 세계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피해에 대해서는 당대 국제법의 원칙에 준하여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따라서 법정의 목적이 범죄의 진실을 공유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범죄 사실에 대해 일본 정부가 법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있었다.
국제법 전문가로 구성된 판사단은 3일간의 사실 인정을 마치고 12월 12일 약식 판결을 내렸다. 1년 후인 2001년 12월 3일과 4일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여성국제법정’ 최종 판결을 내렸다. 즉, 일왕 히로히토와 전범 9명은 ‘인도人道에 반한 죄’를 저질렀으며,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성국제법정’의 의미를 기록하는 많은 연구자는 초국적 여성운동, 시민운동의 성과로서 법정의 역사적 성격을 자리매김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한 아시아 각 지역의 여성들은 1992년부터 아시아연대회의를 열었고, 1998년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가 제안하고 아시아 여성들이 동의하여 ‘여성국제법정’ 개최를 결정했다. 전 세계 여성과 시민들은 그 이후 계속된 준비, ‘여성국제법정’ 및 주변 행사, 이후의 실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공간을 가로질러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과 이에 대한 불처벌의 역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문제를 직시하고 바로잡는 민중의 힘을 실감하면서, 성폭력과 부정의不正義의 재발 방지는 가해자에 관한 처벌과 역사적 성찰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지속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세력들의 반발이 여전한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여성국제법정’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국제법정’에서 다뤄지지 않은 것
이 글은 ‘식민주의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여성국제법정’이 충분히 다루지 않은 문제에 대해 검토하려는 것이다. ‘여성국제법정’에 참여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남북공동기소단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내포된 식민지성植民地性 문제를 독립 주제로 설정하려 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여성국제법정’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 윤정옥은 “남북 코리아의 피해자들은 일본의 강점強占 아래 여성으로서 받은 차별뿐 아니라, 국가 정책으로 세운 민족적 차별까지 이중 차별을 받은 사실을 밝히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중 차별의 사실을 헌장에서 분명히 하고, 판결에서 헌장의 정신을 반영하고자 했으나 국제자문위원들은 우리의 주장을 꺼렸다.”고 밝혔다.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정진성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시戰時 하의 보편적인 여성 인권 침해 문제로 수렴되면서 식민 지배 문제를 따지는 일이 다시 과제로 남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북공동기소단 검사 조시현은 “‘여성국제법정’의 판사단이 전후 일본군‘위안부’ 범죄를 따지지 않은 연합국의 책임은 인정했지만, 그 불처벌의 배경이 된 식민주의는 지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여성국제법정’ 역시 전후 연합국들이 전범 재판에서 드러낸 한계를 일정 정도 잇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한편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했던 후지메 유키藤目ゆき는 ‘여성국제법정’에서 근대 일본이 시행한 공창제公娼制의 범죄성이 다뤄지지 않았고 그 결과로 일본인 ‘위안부’가 비가시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피해국 사이의 죄와 벌 문제로만 다루면 ‘일본’의 일부를 이루면서 피해를 본 일본인‘위안부’를 비가시화하고, 그 피해를 낳게 한 국가의 차별적 여성관을 문제 삼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전후 도쿄 전범 재판의 피고인들
연합국은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따지는 자리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성노예제 범죄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여성국제법정’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읽는 ‘여성국제법정’ 판결문
재판 소개와 배경, 준거법, 개인의 형사 책임 등 전체 8부로 구성된 ‘여성국제법정’ 판결문 가운데 피해 사실 확인에 해당하는 부분은 제2부이다. 이는 다시 11개의 소주제로 나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전쟁 배경으로서의 식민주의 문제나 전쟁 성격으로서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는 독립된 주제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남북공동기소단은 1905년부터 일본이 조선을 불법적으로 식민지화했고, 따라서 점령 상태의 조선인 피해자를 동원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으나 판사단은 이 주장을 채택하지 않았다. 조시현은 한일 양국 간에 의견이 합치되지 않은 문제를 판단하는 것에 대해 판사단이 부담스러워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본의 식민지화에 대해 판결문이 언급한 내용은 “제국 일본의 첫 식민지로서 대만과 대만 주민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부분과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조선을 1905년에 비공식적으로, 1910년에 공식적으로 병합했다.”는 부분이다. 이처럼 판결문은 사실만 적시하고 당대 기준이든, 오늘날의 기준이든 국제법에 따라 판단하지 않았다. 반면, 뒤에서는 “일본의 조선 지배는 조선 땅과 사회에 대한 길고도 잔인한 경제적 사회적 착취였다.”, “일본군은 식민지였던 대만을 소녀와 여성의 유용한 공급원으로 보았다.”, “조직적인 성적 서비스에 대한 일본 육군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조선도 성노예 시설을 위해 여성을 조달하는 주요 공급원으로 취급되었다.”고 적시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여성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게 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 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식민지 지배 문제를 따지지 않은 것이다.
한편, 판결문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등이 각각 미국,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음을 지적하며, 각 지역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살폈다. 그리고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일본군의 잔학 행위를 검토하면서 그 일환으로 ‘위안부 제도의 일부로 강간과 성노예제’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반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특징을 ‘조직적, 체계적인 성폭력 시스템’에서 찾는다고 했을 때, 일본군이 그러한 성노예제 시행에 ‘식민지에서 점령지’로 정치적 성격이 이동한 아시아 지역의 특성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거의 살피지 않았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범죄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할 때 위안소의 관리 통제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군‘위안부’의 동원과 이송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판결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일본군은 성노예 제도를 만들면서 나이, 빈부, 계급, 가족관계, 교육 수준, 국적, 인종에 따라 속이기 쉽고 노예 제도에 빠지기 쉬운 가장 낮은 계층의 여성들을 목표로 삼았다. 선발된 여성들은 대부분 주로 일본에 의한 식민지나 병합지의 가난한 시골 지역 출신이었다.”와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사회 각계각층에 걸쳐 많은 사람이 소녀와 여성들을 성노예화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 군인, 헌병, 민간 경찰, 그리고 관료들이 강압적인 납치나 기만적인 징병에 깊이 관련되었으며 민간인들은 여성을 확보하는 데 일본의 하수인 역할을 하였다.”는 서술 부분이다.
일본군‘위안부’의 동원과 이송 시스템에서 일본군이 가장 신뢰한 민간 위탁자는 공창업자였다. 업자들은 일본군이라는 의뢰인을 은폐하면서, 공창제하에서 형성된 인신매매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여성들을 끌어모았다. 그 과정에서 취업 사기, 감언이설, 폭력과 협박이 활용되었다. 피해자의 출신지, 국경 지대, 전지戰地 및 점령지의 경찰, 헌병, 군인들은 공창업자의 ‘위안부’ 모집과 이동, 도착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이렇게 식민지 여성 대다수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 공창업자의 인솔과 통제 속에 위안소로 끌려갔다. 일본의 근대 공창제는 당시 국제연맹으로부터도, 폐창운동가들로부터도, 또 일부의 일본 경찰들로부터도 노예제도, 인신매매제도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공창제를 통해 전시 성노예제를 기획하고 구성하고 운용하였다. 따라서 동원과 이송, 위안소 관리 및 통제 차원에서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공창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역사적 실태를 밝히는 것, 이를 바탕으로 공권력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위안부’를 동원할 때 ‘가장 낮은 계층의 여성’을 목표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공권력이 깊이 관여했으며, 민간인들이 하수인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공창제를 시행한 일본의 ‘법역法域’ 안에서 들여다볼 때 비로소 그 구조가 보일 것이다. 공창제의 범죄성을 외면하면 일본인 피해자뿐 아니라 공창업자의 관리와 통제하에 있었던 식민지 피해자들도 비가시화하게 될 우려가 있다.
‘2000년 법정’에서 증언하는 남북 코리아의 피해 여성들
일본군 성노예제의 조직적, 체계적 범죄의 특성은 식민주의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함께 물을 때
근본적인 해결 방법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소장)
‘여성국제법정’ 잇고 확장하기
‘여성국제법정’의 경험과 성과를 내세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쟁 및 무력 갈등 하의 성폭력 범죄에 대해 각성하고 재발을 방지하려는 노력은 어떠한 시도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성국제법정’의 통시성通時性에 몰두하여 공시성共時性이나 그 내부 각각의 특수 지점들을 놓쳐버릴 수도 없다. ‘여성국제법정’이 마무리된 이후 이에 참여했던 연구자, 활동가들이 “‘여성국제법정’은 끝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모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군‘위안부’ 범죄는 특정 권력이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이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성폭력 시스템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따져 묻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동원하고 성노예화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의 관여가 어떻게 실재했는지 드러내야 한다. 이는 명령 구조의 최고 정점에서 공권력이 저지른 역할을 적시하는 것은 물론, 공권력이 이에 개입하고 수행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대외적으로 ‘제국 일본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인식했던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은폐’라는 대원칙 속에서 어떻게 제도화되어 시행될 수 있었는지 드러내고,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 구조를 해체해야할 것이다.
조선과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 지배 지역, 그리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일본의 점령지라는 정치적 상황은 일본이 대외적인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도 성노예제를 시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었다. 심아정은 식민지 여성들이 겪은 피해가 전후 재판에서 심판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식민지 여성들은 ‘국제법의 타자他者’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후 재판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여성국제법정’도 식민주의 문제를 다루는 데 소극적이었기에 그 한계를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식민주의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여성의 주체적 일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정치·사회 구조를 해체하고,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끌려갔다’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서사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는 탈식민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이해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할 근본적인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군 성폭력 시스템 범죄에 대한 지난 역사인식과 불처벌의 한계를 극복하고, 평화와 여성 인권이 존중되는 더 나아진 세상을 만들겠다는 ‘여성국제법정’의 목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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