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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연해주 한국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순국 100년을 소환하다
  • 김주용,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1919년 4월 11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된 최재형, 올해는 그가 순국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조선왕조 철종 연간에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가 ‘공화국’ 대한민국의 ‘장관’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지만 그의 의거를 지원한 최재형이라는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 ‘페치카’ 최재형에 새롭게 주목하며 뜻 있는 인사들이 그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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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아들, 연해주로 이주하다>

최재형은 18608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최흥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흥백은 노비였고, 그의 아내는 기생이었다. 최재형의 삶은 왕조 조선의 가장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였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869년 함경도 일대는 자연재해로 인해 굶주림이 일상이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희망의 땅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로 이주하였다. 이곳에는 1864년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이주하여 터를 닦고 있었지만 이주자들은 생활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재형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집안과 다른 것이 있다면 최재형은 이곳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1872년 지신허와 얀치혜에 러시아 정교 교회가 설립되면서 교육기관이 설치되었다. 최재형의 부모는 아들의 앞날을 위해 러시아 교육기관에 최재형을 입학시켰다.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훗날 최재형의 민족운동 배경에는 부모의 혜안이 작용한 것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최재형은 러시아 문학과 언어를 습득하였지만 집안 사정으로 가출해서 선원이 되었다. 포시에트 상선의 어린 노동자 최재형은 선장의 도움을 받으며 무려 7년간 선원 생활을 했다. 그에게 선원 생활은 세상 물정을 익히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통로였으며, 접경지대를 넘나들게 했던 구원의 빛이었다.

1877년 선원 생활을 마치고 다음 해부터는 러시아군의 통역으로 일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부와 치안 당국의 통역을 도맡으면서 연해주 지역 사회에서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연해주의 지도자로 우뚝 서다>

1884년 연해주 지역에 군용도로가 건설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최재형은 이 공사 현장의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공사 도중 러시아 군대와 조선인 노동자 간에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원만하게 사건을 해결했고, 조선인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했다. 4년 간의 공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난 뒤 러시아 정부는 도로 건설의 성공을 치하하며 최재형에게 은급 훈장을 수여했다. 조선인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신망이 한층 두터워졌다.

1895년 러시아 당국에서는 얀치혜 지역 한인촌의 규모가 확대되어 새로운 행정 제도를 설치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새로운 행정 단위로 을 설치하였고, 한인 자치 기구인 얀치혜 남도소의 책임자로 최재형을 임명하여 13년간 도헌(군수)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는 한인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와 학교를 지었다. 또한, 한인의 경제력 신장을 위해 가축 사육 운동을 추진하였다. 최재형은 1890년대 후반 통역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자산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포시에트라는 항구를 활용하여 물류 유통업과 건설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중국 근대사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화단 사건과 러일전쟁으로 큰 돈을 벌었다. 두 사건 모두 러시아 군대가 움직였으며, 군납을 통해 최재형을 거부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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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 고택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최재형 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사용되고 있다.

ⓒ국가보훈처

 

 

          

<안중근 의거를 후원하다>

러일전쟁를 통해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조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을 지켜보며 최재형은 연해주로 망명 온 이범윤을 만나 국권 회복을 향해 눈을 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과 연계하여 치밀하고 장기적인 의병 활동을 계획하였다. 최재형은 조선에서 벼슬을 한 이범진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자신은 러시아 패잔병의 최신 무기를 헐값에 구매하여 의병들을 무장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에 19084월 최재형의 집에서는 독립운동 조직인 동의회(同義會)가 조직됐다. 최재형은 동의회 군자금으로 13,000루블의 거금을 기부하였다. 그리고 19087월 안중근, 엄인섭 등의 지휘에 따라 이범윤이 이끄는 창의회(倡義會) 동지들과 함께 두만강 연안 신아산 부근의 홍의동을 공격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거를 가능하게 한 진정한 후원자였다. 안중근은 동의회 회원으로 최재형의 지원을 받았다. 최재형은 안중근이 얀치혜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할 때 일정한 자금을 주었고, 의거 성공 소식이 전해지자 금 400루블을 대동공보사에 보내어 안 의사의 의거를 찬양하였다.

     

     

<위대한 유산, 민주공화국>

최재형은 대동공보를 창간하면서 신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연해주 지역 동포들은 권업회(勸業會)를 설립하여 동포들의 권익 옹호와 민족 단결을 꾀하였다. 권업회 회장으로 활동한 최재형은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1월 연해주에서는 한인 자치를 위해 고려족중앙총회가 개최됐다. 최재형은 한인 대표로 시베리아독립정부에 파견하기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6월에 개최된 전로한족총회에서는 이동휘와 함께 공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연해주의 독립선언은 317일에 시작됐다. 그 열기는 연해주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중심에 최재형이 있었다. 그의 위상은 191941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물론 상해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자산가이자 민족운동지도자로서 신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최재형은 1918년 일본군 침략 이후부터 행방을 숨겨 가며 우수리스크에 거주하였으나, 192045일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의 순국은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의 가족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의 위대한 인생 여정은 노비에서 민주공화국의 지도자로 승화되었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성장한 최재형을 기억하고 소환하는 것, 그의 순국 100주년에 후대들이 꼭 갖추어야 할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