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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1920~2020년, 100년의 역사: 일제시대 연해주 지역과 한인의 활동
  •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올해는 4월참변, 경신참변 그리고 봉오동·청산리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의 시작인 1920, 우리 민족은 억압과 착취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여 독립과 자유를 위한 반제민족해방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연해주 지역은 3·1운동 이전 시기에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줄 근거지로 동포들의 희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지역이었다. 국내외의 이름 있는 민족운동가라면 한 번쯤은 거쳐야만 했던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의 신한촌은 원동 한인의 서울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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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신한촌에서 개최된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행사

 

 

<봉금의 땅, 월경 금지의 땅을 개척한 석전 경우(石田耕牛)’의 함경도 농민들>

러시아는 1858년 청과의 아이훈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아무르 주),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우수리강 이동(以東)의 연해주 지역을 확보하면서 두만강을 경계로 우리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9 세기 이후 청의 국력이 약화되며 국경 통제가 느슨해진 틈과 삼정의 문란 등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착취, 그리고 연이은 흉년을 견디지 못한 함경도의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를 감행했다.

1863년 지신허(地新墟)강 유역으로의 최초 이주 이후 1880년대에는 남부 연해주 일대에 30여 개의 한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러 간에 외교적 관계가 수립되지 않았던 1863~1884년까지의 연해주 지역은 인구 밀도가 매우 낮고, 러시아 입장에서 조속한 식민화가 절실한 지역이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식량과 노동력 공급자로서의 한인 이주민을 환영했다. 한인 이주민들은 식량과 값싼 노동력, 그리고 농업 기술을 제공하여 연해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인 사회의 계급 분화, 원호인과 여호인>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과 1888년의 조러육상통상장정 체결로 한인들의 불법 이민은 금지되었지만, 이미 이주한 한인에게는 1890년대 후반 러시아 국적을 허용하고 토지를 분배해 주었다. 러시아에 입적한 한인들을 원호인(原戶人)이라 했는데, 이들은 입적하지 않은 여호인(餘戶人, 流戶人)과 구별되었다.

원호인 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이들은 러시아어에 능통하여 러시아 정부의 물품 공급과 건설 공사를 담당했다. 이들은 1890년대 후반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동중철도(東中鐵道) 건설 붐, 1900년 의화단 사건, 러일전쟁 당시 군수품을 청부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는 러시아와 조선에서 출세하기도 했고, 김홍륙처럼 조선 정부의 요직에 임명된 자들도 있었다.

     

     

<국권 상실과 민족운동의 전개>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1910년 국권 상실을 전후로, 의병전쟁과 애 국계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를 비롯한 정치적 이주자들이 대거 연해주로 몰렸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관헌들의 우호적 태도 역시 이들의 연해주행을 촉진하였다. 1910년 무렵의 한인 인구는 8~10만 명에 달했다.

을사조약 이후 많은 애국지사가 후일을 기약하며 연해주에서 민족운동을 개시했다. 한인 사회의 지도자 최재형과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자 헤이그 밀사였던 이위종이 이범윤, 안중근, 엄인섭, 김기룡 등과 함께 동의회라는 의병 본부 조직을 창설하여 과감한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1908년 여름, 의병운동은 지도부 분열, 원 호인 부호의 의병반대운동 등 여러 요인으로 쇠퇴했다. 가을 이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와 이를 계승한 국민회(國民會)가 파견한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이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양보등의 한인신문을 무대로 러시아 각지에 국민회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0년 국망의 절박한 상황에서 13도의군과 성명회 결성으로 의병운동이 일시적으로 고조되었지만,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지도자들이 체포 또는 유배당하거나 오지로 도피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1910년대 연해주 지역 한인 활동의 중심 기관은 권업회(勸業會)였다. 권업회는 러시아 당국의 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출범한 한인 대표 기관이었다. 권업회는 권업신문발간, 한인 학교 설립과 강좌 개설, 러시아 국적 취득 알선, 이만강 이북 라블류 지역의 농업 단지 건설 계획과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행사 등을 추진하였다. 19125월에 창간한 권업신문은 당시 미주의 신한민보, 신한국보(후에 국민보로 개칭)와 함께 대표적인 3대 항일 민족 언론지였다.

특히 이동휘, 이종호, 이상설, 이동녕 등 애국지사들은 1913년 말 러일전쟁 10주년에 대비하여 항일광복 전쟁을 목표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동맹국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권업회 해산과 권업신문폐간을 명령하고 애국지사에 대한 체포와 추방령을 내렸다.

     

     

<러시아혁명과 한인사회>

러시아 한인은 2월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191764, 니콜스 크-우수리스크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로한족대표자회(全露韓族代表者會)가 개최되었다. 이 대표자회는 전 러시아 한인을 대표하는 회의 임에도 원호인의 자치와 권리 신장만 강조한 점, 당시 구속된 이동휘 등 항일 운동가 석방 문제 등을 소홀히 한 점, 그리고 대회를 주도한 원호인들이 고려족중앙총회를 조직함으로써 여호인 농민과 망명 애국지사의 반발을 샀다. 대회의 결의에 따라 신한촌과 니콜스크-우 수리스크에서 각각 한글 신문 한인신보청구신보가 창간되었다.

10월 혁명 발발 후, 친 볼셰비키적 노선을 취한 망명 애국지사들과 여호인 농민은 하바롭스크에서 별도의 한족중앙총회 조직을 추진하였다. 이는 소작농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원호인에 비해 한층 항일적이었다. 결국, 고려족중앙총회와 한족중앙총회는 5개월 후 개최할 전로한족대표자회에서 원호인과 여호인을 통합하여 새로운 중앙 기관을 성립하기로 합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동휘, 김립, 박애, 이한영, 장기영 등은 김 알렉산드라의 지도를 받아 1918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였다.

1918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129명의 각 단체 대표와 학교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제2차 특별 전로한족대표자회가 개최되었다. 시국 문제, 토지 문제에서 크게 대립하였고, 반 볼셰비키적 입장을 취했던 사회혁명당의 원호인들이 다시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조직했다.

19186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이 봉기하자 일···프 등이 체코군 구원의 명분을 걸고 무력 개입을 단행하며 시베리아 내전이 개시되었다. 이에 연해주에는 간섭군의 지원을 받은 백위파 정권이 들어섰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가까스로 합법적 지위를 유지하였지만, 한인사회당 그룹은 농촌이나 만주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삼월일일 

1923년 3.1운동4주년을 기념하여 창간된 한글 신문 삼월일일

     

     

<3·1운동과 한인사회>

연해주 지역에서의 3·1운동은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주도하였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러시아 지역, 서북 간도, 그리고 국내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전체 한인의 최고중앙기관임을 자임하였고, 연해주 각지에서 독립선언집회를 주도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정과 중앙기관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였지만 통합에 합의하고 19198월 해산하였다. 이동휘는 통합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교통총장에 선임된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상해 임정의 약속 위반을 비판하며 취임하지 않았다.

1920년 연해주 지역은 일본군이 자행한 4월참변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4월참변이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연해주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사회를 공격한 만행적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러시아혁명정부의 공공기관을 공격함과 동시에, 연해주 각지 한인들에 대한 대량 검거, 학살, 방화, 파괴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한인 76명을 검거하였으며,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한인 지도자들을 학살하였다.

1920년 초 이래 볼셰비키혁명세력이 백위파 정권을 붕괴시키며 힘이 커지자 러시아 각지에 한인공산주의세력이 등장하였다. 1921년 봄 아무르 주 자유시(스바보드노에)에는 경신참변(간도참변, 간도사변)을 피해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부대와 연해주, 흑룡주에서 활약하던 한인 빨치산 부대 3천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 한인 무장 부대를 둘러싸고 치열한 군권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1921628일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군정의회가 상해파의 사할린 의용대를 무장 해산하면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동족상잔의 자유시참변이 발생하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건설기, 한인사회의 제 문제>

192210월 말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고, 소비에트 정부와 일본 간의 완충국으로 존립해 온 원동공화국(Far Eastern Republic)의 인민 혁명군이 입성함으로써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에는 원동공화국이 소비에트 국가에 공식 편입되었다.

토지 문제는 한인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와 맞먹는,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절실한 문제였다. 소비에트 정부의 적극적인 토지 분배 정책으로 한인의 토지 보유가 증가하였음에도, 국내와 만주로부터 계속되는 이주자 유입은 토지 문제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인들에게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러시아 국적 취득이었다. 19238, 원동변강집행위원회 간부회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투쟁한 한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러시아 국적을 부여할 것을 결정하였다. 1926년 당시 총 52,635명이 러시아 국적자였는데, 이는 전체 한인의 약 31%에 달하였다.

192712월 개최된 소련공산당15차대회는 대규모 사회주의 농업 생산의 집단화로의 전환을 결정, 15개년 계획을 입안하였다. 1928~1930년까지 전개된 반우파 투쟁은 집단화 반대파에 대한 투쟁으로, ‘토호로 불린 부호 원호인들이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거의 모든 한인 농촌에서 과거의 원호와 여호 간의 대립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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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에 설립된 고려사범대학건물(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의 볼셰비키적 교육·문화운동>

1929년 당시 연해주 지역 한인은 총 168천 명으로 문자 해독률이 34%였다. 한인사회의 대중교육시설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는 1918년 한족회 주도로 설립된 중등학교인 조선인사범학교가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 정식 설립되어 1936년까지 10년간 244명의 교원을 배출하였다.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고려사범대학는 국내외를 통틀어 한인을 위한 최초이자 유일한 고등사범대학이었다.

또한 이 시기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선봉이 간행되었다. 선봉19233삼월일일이라는 이름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을 시작하여 19378월까지 발행되었다. 한편, 1932년 신한촌에서 창립한 한인종합예술단체 고려극장(高麗劇場)은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스탈린의 대탄압>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침략 활동이 활발해지며 국경에서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299월 만주 군벌 장샤오량(張學良)의 동중철도(東中鐵道) 무력 점령 시도는 중·소 간 무력 충돌을 유발했고, 소련은 국경을 봉쇄하였다. 특히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마침내 19377월에는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다. 당시 일본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소련은, 무력 충돌의 소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19353월 동중철도를 일본에 매각하였다.

193412월 레닌그라드당 서기인 키로프가 암살된 이후,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에 대한 처형을 시작으로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이 이어졌다. 1935년의 제17차 당대회에 참여했던 1,961명 가운데 1,108명이 희생되었다. 원동 지역의 볼셰비키세력 대다수가 스탈린 처형의 태풍을 벗어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러시아 내 소수 민족 가운데 중국인은 11,000명이 체포되고, 8,000명이 추방되었다. 600명의 폴란드인, 수백 명의 독일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그리고 1,000명의 백계 러시아인들이 체포·처형되었다. 한인 지도자들 역시 약 2,500명이 체포·처형되었다.

     

     

<한인 강제 이주>

1937821일 소련중앙인민위원회와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는 일본 간첩의 침투를 차단하기 위해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인민위 의장 몰로토프와 중앙위 서기장 스탈린이 서명한 결의안에 따라 한인들은 193811일까지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다. 강제 이주는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에는 국경 지역 거주 한인, 2차에는 내지 거주 한인이 대상이었다. 124대의 수송 열차에 강제로 실려 36,442가구 171,781명이 원동 지역을 떠나야 했다. 이 중 20,170가구 95,256명은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16,272가구 76,525명은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이송되었다.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는 러시아 한인사회 전체의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한 대사건이었다. 강제 이주는 한인 지도자 2,500여 명에 대한 대탄압과 함께 1860년대 이래로 한인사회가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쌓아 올린 정치적·사회경제적·문화적인 모든 성과에 대한 전면적이고 비극적인 파괴 행위였다.

새로운 땅, 새로운 환경에서 또다시 새로운 삶을 개척한 한인들은 강제 이주 후 가장 어려운 시절인 1937년과 1938년을 극복하고 특유의 근면성과 끈질김으로 새로운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갔다. 이들은 스탈린 사후 1956년까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치적인 활동도 금지당했다.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건설에 크게 공헌하였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대우는커녕 혹독하게 처형되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한인 지도자들이 복권되기 시작한 것은 흐루쇼프(Хрущёв)가 이른바 스탈린 격하 운동을 개시한 1956년 이후의 일이다. 이때서야 비로소 한인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와 정치 활동 참여가 허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