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외교학과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를 취득하였다. 2005년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 선임연구관을 역임하였고, 동북아역사재단 발족 이후 현재까지 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서울대, 고려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서 한국외교사, 동북아 국제관계 등을 강의했다.
「개항기 청의 대조선 정책」, 등 근대 한국외교사와 정치사, 동북아국제관계사와 관련한 논문들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 사회과학 개념사: 조공에서 정보화까지』(공저), 『갑오년의 동아시아: 1894와 2014』(공저) 등이 있다.
2019년은 대한민국에 특별한 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3·1운동은 남녀노소, 계층을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진행된 저항 운동이었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지난해부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관련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김현철 연구위원을 만나 연구 사업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지난해부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관련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이런 연구 사업을 구상하게 된 까닭이 있을 텐데요. 그 배경과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연구 내용이 궁금합니다.
A
지난해 시작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관련 연구 사업은 내년까지 3개년에 걸쳐 이뤄질 예정입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의 역사이지만 동아시아에서, 특히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재단은 한일 간의 역사와 현안을 심도 있게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이번 사업 또한 같은 맥락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연구 사업이 시작된 지난해에는 주로 3·1운동 이전까지의 배경을 사상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연구였다면, 올해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3·1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공화주의, 혹은 여러 가지 평화사상이 3·1독립 선언서와 임시정부의 대외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겁니다. 내년에는 3·1운동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과 세계 각국의 임시정부를 비교 연구해볼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 활동과 당시의 유럽 혹은 다른 나라의 임시 망명정부를 비교해 보는 것이죠. 이러한 연구 결과는 매년 총서로 발간되어 배포될 예정입니다.
Q
지난해 재단은 11월 21일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과 의의’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비판과 공화주의 수용과정을 주로 다루었는데 당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나요?
A
11월에 열린 학술회의는 ‘3·1운동 전사(前史): 한국에서 사회진화론 비판과 공화주의 형성 과정’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서 ‘민주 공화제’를 선언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죠. 그래서 작년 학술회의에서는 3·1운동 당시 힘의 논리에 기반한 권력정치(Power Politics) 현상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공화주의’를 지향하게 되는 과정을 재조명해 봤습니다. 제1세션이었던 ‘서구 사회진화론과 공화주의 사상의 전파와 한국 내 수용’에서는 3·1운동 이전까지 적자생존을 정당화했던 사회진화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분석했습니다. 더불어 공화주의 개념이 한국에 소개되고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2세션의 주제는 ‘20세기 초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진화론 비판과 공화주의 인식의 양상’이었는데요. 박은식, 이상룡, 신채호,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에 초점을 맞춰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을 살펴봤습니다.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이 ‘공화제’를 구상하게 된 과정도 조명해 보았고요. 제3세션은 종합토론으로 진행됐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공화주의 형성의 특징과 시사점’이었습니다.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파리강화회의나 민족자결주의 외에도 다양한 국제 정세의 영향을 받아 3·1운동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평화 운동으로서의 3·1운동과 그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상적, 지성사적 배경을 밝힐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야기할 때 '공화주의' 혹은 '공화제'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됩니다.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이나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공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A
구한말 군주국 체제에서도 공화주의가 소개되고 그 장점을 설명하는 글들이 쓰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재위 시, 그러니까 1907년 대한제국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기 전까지는 공화주의란 표현 자체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군주제를 부정하면 반역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당시를 보면 공공연하게 우리나라가 공화제를 하게 되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대해 후보자들이 거론될 정도였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정치제도가 발전되어있는 나라들이 시행하는 공화주의에 대해 간접경험을 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보면 ‘정부의 종류’에서 다섯 가지의 정치체제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중 유길준은 ‘임금과 국민이 함께 다스리는 정치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입헌군주제를 선호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공화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군주제의 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1907년 안창호를 중심으로 창립된 ‘신민회’는 공화주의 이념을 지향하는 비밀조직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형태로 우리가 공화주의를 수립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안창호, 이승만과 함께 일제강점기 재미 한인사회를 이끌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박용만은 ‘무형 국가론’을 주창하는 데요. 무형 국가론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주권과 영토를 빼앗겼지만, 국민이 있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공화주의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1910년대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정부를 군주제가 아닌 형태로 만들기를 희망했습니다. 작년 11월 학술회의에서 이를 공화주의의 연장 선상에서 봐야하지 않느냐 하는 의미 있는 논의가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 당시 공화주의라는 표현이 군주제가 아니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마치 시대적 변화를 상징하는 슬로건처럼 나온 말이 아닐까 하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야 민주주의도 겪어봤고, 공화주의도 겪어봤으니까 공화주의가 민주주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 측면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경험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한제국이 망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금 세울 나라는 군주가 아닌 형태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뭐냐?’ 하는 고민 끝에 공화제, 공화주의로 이해했다고 보는 겁니다.
Q
재단에서는 오는 4월 9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각국의 민족독립운동과 민주 공화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을 예정이라고 하던데요.
A
오는 4월 9일, 프레스센터에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이번 회의에서 다룰 주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계사적인 의미인데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배경으로서 공화주의, 민족독립운동의 전개 과정 그리고 임시정부의 대외활동을 재조명하는 형태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전반부에서는 1차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보려 합니다. 아일랜드, 중국, 일본, 한국의 사례를 비교분석하는 내용으로 진행될 예정이고요. 영국은 벨파스트 퀸즈 대학의 맥캐리 교수가, 중국은 중국사회과학원의 허우중쥔 박사가, 또 일본은 교토대학의 미즈노 나오키 교수가, 그리고 한국은 재단의 신효승 연구위원이 발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는 3·1독립 선언서의 구체적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동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되짚어 볼 예정입니다. 3·1독립 선언서에 나타난 평화사상과 세계주의에 대해서는 서울대 장인성 교수가 발표를 준비 중이고, 3·1혁명론의 민주 공화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윤대원 연구원이 3·1운동 이후 창간된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나타난 사상들에 대해서는 정진석 한국 외국어대학교 교수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또 재단의 서종진 연구위원이 3·1운동 이후 일본 식민지 통치의 변화를, 장세윤 연구위원이 상해에서의 임시정부 활동에 대해 발표하게 됩니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한·중·일, 그리고 유럽과 우리나라를 비교하고 1919년 3·1독립 선언서가 가진 의미를 다시 한 번 재해석하는 학술회의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Q
그동안 우리 사회와 학계를 돌이켜 보면 몇 주년이 되는 해에는 이를 기념하는 많은 학술행사가 개최됐지만 지속적으로 그 의의와 과제를 생각해보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지난 이후에도 재단에서 이와 관련한 연구 사업을 구상하고 계시나요?
A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100주년이 되는 금년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입니다. 그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이것이 끝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거죠. 그간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한 측면이 많다고 봅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 2009년과 2010년에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굉장히 큰 행사들이 다양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연구 사업과 행사가 조금씩 시들해지는 게 보였습니다. 사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에 관련한 여러 가지 연구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동양 평화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를 하나씩 풀어가야 하는 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몫이고 재단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학계와 국민의 관심이 지금처럼 뜨겁게 계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100주년에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재단 또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연구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3·1운동의 영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당시 세계사의 변화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비교하여 자세히 밝혀야 합니다. 또한 당시 일본, 중국 및 미국, 유럽등 국제사회가 3·1운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관련 기록들을 조사 분석하여 재조명하는 연구도 진행하려고 합니다.
Q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미래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를 한 번 더 신중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의 행보가 기대되는데요. 추후 한일 간의 역사현안과 관련한 연구 분야로서 계획하고 계신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감옥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어떠한 죄악을 저질렀는지를 쭉 나열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거죠.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이후 한·중·일이 어떻게 같이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동양평화론’을 제시했습니다. 재단도 일본의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뭘 잘못했는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일본이 어떤 망언을 한다든가, 교과서 왜곡을 할 때 제대로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2020년이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110년이 되는 해가 되거든요. 110년을 맞아 한일 관계를 조금 더 미래지향적으로 이끌어 나갈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말해 일본의 역사인식의 잘못은 지적하고 바로잡으면서, 앞으로 동북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제안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재단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재단에서는 오래전부터 한일 관계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일본과 맺은 불평등한 조약들, 일본의 식민지 통치,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들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모으고 검증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작업을 장기적으로 지속하면서 어떤 현안이 발생했을 때 일본 측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반박해 왔고, 앞으로도 쭉 이러한 일들을 계속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는 재단 자체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국내 학계 인력과 더 나아가 외국 학자들과도 협력해서 함께 연구해야 할분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