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과 국호 ‘고려’
송악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난 왕건王建,877~943은 태봉국 궁예弓裔의 신하가 되어 공을 세우다가 궁예가 흉폭한 행동을 일삼자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高麗를 건국하였다. 그후 935년 신라를 합병하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태조 왕건은 자신이 미천하고 평범한 출신으로서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노력한 지 19년 만에 삼한三韓을 통일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려사절요」에서 사신史臣이 태조를 평하기를 너그럽고 성심으로써 대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귀부를 받을 수 있었고, 도량과 심오한 지략,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이 고려 500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또 다른 태조의 치적으로 강조된 것이 발해渤海에 대한 정책이었다. 사신은 앞의 평가와 함께 “거란과 같은 강자가 동맹국을 침공하여 멸망시키니 곧 그들과 관계를 끊었고, 발해와 같은 약자가 영토를 잃고 돌아갈 곳이 없게 되니 곧 그들을 위무하였다.”고 하였다.
고려 이전에 발해도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사용한 시기가 있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8세기 중엽 발해와 일본은 교류할 때 발해를 ‘고려국’, 발해왕을 ‘고려 국왕’이라고도 칭하였다.
고려와 발해의 혼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초기부터 발해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양국 간에 혼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왕건이 서역의 승려인 “말라襪囉를 통하여 후진後晉 고조高祖에게 이르기를 ‘발해는 나와 혼인婚姻 한 사이인데 왕이 거란에 잡혔으니, 청컨대 후진 조정과 함께 거란을 쳐서 발해왕을 구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나 고조는 응답하지 않았다.” 하고, 또한 왕건이 “발해는 본래 나의 친척親戚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한다.《자치통감資治通鑑》개운2년(945)조
왕건이 지방의 유력하거나 신분이 높은 인물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지원을 얻기 위해 이들과 혼인을 꾀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발해인 중 여기에 부합되며 왕건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있다. 대광현은 나라가 망한 뒤 고려로 온 발해의 세자이고, 아울러 많은 관리와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군사적 역량도 상당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왕건과 대광현 간의 혼인은 응당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 시기는 대광현이 고려로 온 926년부터 후진 고조의 재위 기간936~942 사이일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와 대광현의 딸이 결혼하였다면 태조의 나이로 미루어 대광현이 고려로 온 926년에서 가까운 시기일 것이고, 대광현이 태조의 딸과 결혼을 한 경우도 그가 고려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왕건의 발해 인식
태조 왕건의 발해에 대한 인식은 만부교萬夫橋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거란이 태조 25년942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하였는데, 태조는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친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하고 배반할 마음을 일으켜 옛 맹세를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켜 버렸으니, 이는 매우 도의道義가 없는 것”이라며, 사신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어 죽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왕건의 적개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943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 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제현李齊賢은 태조가 이렇게 한 까닭이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왕건의 말 그대로 거란이 ‘친척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반발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고구려 땅을 둘러싼 거란과의 다툼이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거란에 대한 인식은 유명한 서희徐熙,942~998와 소손녕蕭遜寧의 담판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성종 12년993, 거란이 조빙과 서경西京이북의 땅을 할양할 것을 요구하며 대규모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 의하면,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汝國興新羅地, 高勾麗之地, 我所有也, 그대가 침식”하였다고 하니, 서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非也. 我國卽高勾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만일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그대의 나라 동경東京은 다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오.”라 하였다.
소손녕이 고구려 땅이 거란의 소유라고 한 것은 거란이 고구려 땅에 대한 연고가 있다는 의미이면서, 아울러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바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서희와 소손녕 간의 대화에는 고려와 거란이 모두 고구려에 대한 연고가 있고,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소유도 주장하지만, 정작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에 의해 그 옛 땅에 건국되었던 발해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의아스러운 점이다.
‘남북국을 통합’한 고려
조선 시대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8~1807은 이 점을 지적하며, 고려에서 발해가 갖는 의미를 명확히 설명하였다.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저 김씨신라가 망하고 대씨발해가 망하는 데 이르러 왕씨王氏가 그것을 통일하여 소유하고 고려라 하였다"라며, ‘남북국南北國’이었던 신라와 발해를 통합한 것이 ‘고려’라고 주장하였다. 고려가 신라와 발해를 통일했으므로 신라와 발해 땅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바로 발해의 역사를 편찬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하여 고려가 부진하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