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셈 베르메르스
Sem
Vermeersch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소장
벨기에 겐트대에서 동양언어문화학을 전공하고, 런던대 SOAS에서 한국학 석사와 한국불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현재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직을 맡고 있다.
2010년 미국아시아학회(AAS) 제1회 제임스 팔레 저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 등이 있다.
올해는 고려 건국 1100주년으로 고려의 역사적 의의를 성찰할 수
있는 특별한 해다. 고려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보장하고 유구한 문화를 꽃피운 나라,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정교한 다원 외교로 살아남은 통일국가였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셈 베르메르스가 바라본 한국학의 지형은 어떤 모습일까.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고려의 역사를 성찰하는 특별한 해, 한국학의
국제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셈 베르메르스 소장을 통해 한국학과 고려사의 현재성에 주목하여 그 역동적 양상을 살펴보고, 향후 고려사 연구의 방향에 대해 전망해보았다.
Q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로서 한국
학자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료를 분석하고,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언어나 문화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느낀 적도 있으신지요?
A
출신국이나 국적에 따라 분석이나 판단 기준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은 한국학의 본고장일 테고, 저는 학자로서
여러 분야 전문가와 교류하고 배울 수 있는 큰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1990년대 서양 학자들은 주로 한국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관심을 두었지만 요즘은 젠더, 통계, 의학사적 관점 등 새롭고 신선한 시각의 연구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사에 더 비판적이거나 객관적일 것이라고 속단하면 안 됩니다. 제 한국인 동료들은 저보다 더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쨌든 30여 년간 한국어를 연구했는데도 특정 뉘앙스를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언어 장벽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한국어 외의 언어로 한국사를 기술할 때는 용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데 예를
들어 한국인은 중세 한국의 토지 개념을 설명할 때 사전私田, 공전公田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 되지만 영어로 표현할 때는 private land, public
land, prebends 중 무엇을 선택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더욱이 한자는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結결’ 자의 경우 로마자 ‘gyeol’로 표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한글이나 한자를 모르는 외국인에게 올바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글자가 과거 토지 면적의 단위였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Q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가 많이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구 성과나 결과 등에서도 변화가 느껴지시나요?
A
처음 한국학 연구를 시작한 90년대 초에 비하면 외국인 학자 수뿐만 아니라 연구 자체도 비약적으로 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워낙 좁아서 한국학을 연구한다고 하면 서로 다 알 정도였고 역사와 언어, 인류학과 근대사 등 여러 분야를 동시에 연구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문학’이나 ‘한국사’만 세부적·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회가 생겼을 정도입니다. 예전엔 유럽
전역을 통틀어 한국학을 연구하는 단체가 유럽한국학회AKSE: The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in Europe 하나뿐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단체가 활동
중입니다.
동시에 관심 분야도 역사, 유교 문화, 조선 시대 예술 같은 전통적 분야에서 근대·현대적인
분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7~80년대는 주로 한국의 무속신앙이나 시골 마을을 연구했다면, 최근에는 K-POP이나, 퀴어문화, 대학입시학원 같은 주제도 연구합니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 사회의
역동성에 따른 당연한 변화입니다. 하지만 학부 때부터 한문을 포함해서 전근대사에 대한 기초를 닦아두지 않으면 석사 이상 수준의 한국
전근대사 연구에서 원하는 성과를 얻기에는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Q
고려사는 한국사 중에서도 소외된 학문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 시기를 전공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아무래도 미개척 분야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때는 ‘고려사’ 자체가 희귀했고 ‘고려불교’나 ‘선사’, ‘고대사’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석사 전공은 신라불교였는데
연구를 하면 할수록 자료를 취하기 어려워서 박사 전공은 고려불교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영어로 된 연구라고는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의 「지눌총서」 와 존 던컨John
Duncan의 「신흥사대부 중심의 고려-조선왕조 교체에 대한 반론」 뿐이었습니다. 고려사를 전공한 것은 주류 연구를 피하고자 틈새시장을 노린 전략적인 면도 있지만 고려 시대의 국제적이고 실용적인
외교라든지, 포용적인 불교 문화, 훌륭한 예술 세계에 매료되었던
이유가 큽니다.
Q
최근 구미 학계는 한국사 중에서도 현대사에
집중해서 연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아시아 및 세계사 서술 흐름에서 중세 한국사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고려사를 비롯해서 어느 특정 시대만 연구하는 학자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개 전근대사를 도전하기 힘든 분야로 생각하는 건 현재의 삶과
큰 연관이 없어 보이기 때문 아닐까요? 어쩌면 학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절한 주제와 분야를 선택하고 조정하는 것, 현재 가치를 인정받는 분야와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 한국사를 기술한 책 중 가장 성공한 데이비드 로빈슨David
Robinson의 「제국의 황혼Empire’s Twilight」만 보아도 고려 자체가 아니라 몽골제국에서 고려의 역할에 관해 기술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 방법에는 고려사가 다른 주제의 일부로만 보일 수 있다는 단점, 중요 내용을 놓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연구의 적절성과 가치를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Q
소장님께서는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 서긍이 고려를 다녀와 남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영문으로 번역 출간하셨습니다. 이런 번역
작업에 대해 개인적 생각이나 소명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A
번역은 연구와 불가분의 것이고, 특히 전근대 언어를 심층 연구 없이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연구논문이나 책을 쓰기 전에 주요 구절들을 먼저 번역해보곤 합니다. 무엇인가를 자료로 삼기 전에 번역상
문제가 없도록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고려도경」 번역은 완역의 기쁨과 함께 번역
역량을 연마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후속 연구에 유용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주었고요. 하지만 서긍徐兢,1091~1153은 대부분의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강한 선입견을 품고 고려를 방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의 기술 내용을 그대로 믿기에는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고려가 송을 숭상하고, 문화에 의존하고, 모든 면에서 추종했다고 확대해석했습니다. 물론 ‘송과 고려의 차이점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고려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심지어 양국의
차이를 기술하는 방법도, 그에 필요한 사상적 틀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편으론 후속 연구 촉진을 위해 더욱 심도 있는 번역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번역본은 원본을 쉽고 빠르게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케임브리지 한국사고대사, 고려사, 조선사, 현대사 4권으로 구성」 발행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네덜란드 라이든대
렘코 브뢰커Remco Breuker 교수와 함께 책임 편집자로 고려사 집필을 맡았습니다. 매우 기대되고 흥분되는 동시에 겁이 나기도 합니다. 케임브리지 역사
시리즈는 단순 나열이나 반복적인 편집이 아니라 누구보다 앞서고 명망 있는 전문가들의 책임 있는 집필에 따른 신뢰(세부
내용, 사실관계, 방대한 주석 등)와 도전적 연구 성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에 수십 년간 구축된 방대한 자료를 단조롭게 압축하여
기술하는 작업은 하지 않을 겁니다. 고려사 분야도 그 기준에 부합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려고
합니다.

Q
고려사를 연구하시는 분으로서 남북관계
변화에 대해 기대하는 부분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A
동료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양에서 저명한 한국학자가 되려면 먼저 북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미디어는
오로지 북한에만 관심이 있으니까”라고. 그런 농담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재의 한국학은 분명 정치적 상황에
발목이 잡혀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을 때 개성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며 남북한 접촉과 교류 활성화에 고무된 적이 있었습니다. 개성은 고려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학자로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만월대’ 발굴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들 어마어마한 발견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남북의 신뢰 회복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고, 지속적인 유물 발굴이나 재건보다도 중요한 일이기에 최대한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만월대 발굴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고 연구에 활용하려
했지만 개성에 가본 적도 없거니와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이를 연구와 연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앞으로 한국에 남아 있는 묘, 건축물, 난파선, 농경지
등 고려 시대 유적에 대한 충분한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지면 고려에 대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온 기술을 상당 부분 다시 쓰고 재평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향후 고려사 연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학계나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나 충분히 흥미로운 유적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어쩌면 만월대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도 보지만 만월대의 상징적 의미와 중요도에 묻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Q
현재 한국 사회의 ‘다문화’ 개념과 고려
시대의 다원주의적 경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A
이는 ‘다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회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문화는
외부와의 정기적인 교류 없이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문제는 외부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인정하느냐일
뿐 타 문화에 대한 관용과 개방의 시기, 폐쇄와 거부의 시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실제 고려가 다문화 사회였던, 관용적 사회였던, 다원주의적 사회였던, 다극성 사회였던지와는 무관합니다.
고려는 조선처럼 정통성에 매달리며 ‘적통’을
강조하는 대신 기존 국가들을 역사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브뢰커 교수가 「중세 한국 다원주의 사회의 성립Establishing a
Pluralist Society」에서 밝힌 것처럼 고려는 모순과 불일치와 모호함을 허용하고 다양한 사상과 문화, 개방적인 정치와 사회의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 측면에서 다원주의적 가치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다원주의는 현재의 다문화 개념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사회가 고려를 본보기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기대를 과거에 투영하는 것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Q
고려사 연구자로서 재단의 국제화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A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학술 연구가 지나치게 트렌드를 따르거나 정치적으로 휘둘리면 반드시 신뢰를 잃게 되어있습니다. 번역이든, 수준 높은 출판물 간행을 위해서든 미래에 대한 최고의
투자는 사람입니다. 한국 전근대사 분야에서의 석좌교수제도 정착은 고려나 조선 초기 연구를 활성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겁니다. 한국사 연구 박사과정을 지원하는 인재양성사업도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석좌교수제도나 박사과정지원 등은 장기 과제이기에 학술 지원의 관행으로 되어 있는 근시안적 성과주의에 배치되는
면도 있지만 가장 최고의 투자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디 ‘고려 건국 1100주년’이 연구자에게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대중에게는 고려의
유산을 널리 알리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