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 일본은 ‘북방영토의 날’을 맞이하여 도쿄(東京)와 홋카이도(北海道) 네무로(根室)시에서 ‘영토반환 요구운동’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2016년 12월 일·러 정상회담 이후 개최된 대회라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지난 정상회담의 성명에 대해서 “평화조약에 대한 ‘진지한 결의’가 포함되었다”고 하면서, 올해 쿠릴열도 문제에 진전이 있기를 희망하였다. 전(前) 쿠릴열도 주민들은 “영토 문제의 구체적 진전은 없었고, 자신들의 마음은 그저 헛될 뿐”이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면서, 쿠릴 4개 섬에서의 공동경제활동은 “영토 문제 해결과 관련되지 않으면 안 되며, 일본 정부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교섭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쿄 대회에서는 아베 총리가 직접 참가하여 “쿠릴열도의 미래상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발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노력은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일보라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70년 동안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과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한 대화를 하면서 결의를 공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일본 정부는 영토 관련 역사적 경위를 이해하면서 ‘새로운 접근’에 따라 공동경제활동을 위한 ‘특별한 제도’에 대해 교섭할 예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베 총리는 일·러 평화조약 체결에 탄력을 가하기 위해 2017년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며, 조약 체결을 향해 노력할 것이라 강조하였다.
이 글에서는 ‘북방영토의 날’과 관련한 역사적 경위를 살펴보면서, 일·러 양국의 영토 관련 주장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또 쿠릴열도를 둘러싸고 일본이 국제화를 진행하면서 영토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최근 쿠릴열도의 ‘러시아화’와 ‘일본화’ 흐름 속에서 향후 일본이 어떻게 영토를 반환받으려 노력할 지를 살펴볼 것이다.
쿠릴열도 문제의 역사적 경위
전후 일·러 간 영토 문제는 냉전의 시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시 말해 미-일 동맹관계가 형성됨으로써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악화되고, 결국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일본 외교의 중요 사안이 되었다. 일본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조인하면서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쿠릴열도를 포기하였다. 당시 소련은 위 조약에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평화조약 체결 문제가 현안이 되었다. 이후 양국은 쿠릴열도 귀속을 둘러싼 영토 문제 해결에 대해 서로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1956년 일·러 회담 이후 양국은 ‘일·소 공동선언’에 조인하고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였다. 이 선언에서 양국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두 개의 섬을 일본에 반환한다”고 명기하였으나 냉전으로 상호 교섭은 멀어지고 대립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 정부의 기본 입장은 ‘4개 섬 일괄 즉시 반환’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련으로부터 ‘2개 섬 반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고르바초프의 신사고(新思考) 외교가 전개되면서 소련의 적극적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 외무성과 전문가, 여론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생겼다. 외무성은 완고한 태도를 취했고, 전문가들은 ‘2개 섬 반환론’을 주장하였다.
이후 양국은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다가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일·소 공동성명에서 영토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2개 섬 반환을 인정하고 쿠나시리와 에토로후 협의에도 응한다는 비공식적 ‘쿠나제 제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쿠나시리와 에토로후 반환이 보증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고르바초프로부터 영토 문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포괄적 경제협력의 조건으로 4개 섬을 반환하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주권을 인정해주길 바랐다. 이후 ‘잠재주권’이라는 구상에 이끌렸지만 소련은 주목하지 않았다. 일본의 이러한 노력에도 고르바초프의 방일 결과를 보면 영토 문제에서 진전이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일본이 요구하는 56년 공동선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러 간 영토 문제는 1996년 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지금까지의 ‘확대균형 정책’에서 ‘중층적인 접근’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러시아와의 근본적 관계 개선을 실시하여 2000년까지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1998년 4월 일본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총리는 “러시아가 4개 섬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당분간 러시아의 시정권을 인정하겠다”는 ‘가와나(川奈) 제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은 여전히 4개 섬 반환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괄 반환’으로부터 ‘단계적 반환’으로 이행할 의사를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쿠나제 노선은 2개 섬 반환과 다른 2개 섬은 계속 심의를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러 간 2개 섬과 4개 섬에 대한 인식은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차이를 보였다.
2012년 러시아 대통령에 푸틴이 당선되고 영토 문제에서 서로 양보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아베 총리와 푸틴 대통령은 2013년 4월 정상회담에서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 노력을 가속화하자는 의견 일치를 보았고, 이후 여러 번의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두 정상은 ‘새로운 접근’을 논의하기로 합의하며 2016년 정상회담에 이르게 되었다.
쿠릴열도에 대한 일본의 국제화 전략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 전개와 함께 일본은 자신들이 영토 문제에서 고립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북방영토 문제의 국제화’를 시도하였다. 이는 국제적 고립을 예방함과 동시에 서방국가들로부터 일·러 간 영토 문제에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쿠릴열도 문제는 냉전기 미국의 전략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일본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들어가기 위해 일·소 관계를 개선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에게 쿠릴열도 문제는 당시 일·소 관계 개선을 막기 위한 안전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외교가 전개되면서 미국은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원했고 오히려 쿠릴열도 문제를 해결해 새로운 국제관계 환경을 만들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중계자 역할로 입장이 변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미국이 일본의 입장을 지지해줄 것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일본은 국제환경의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제 전략도 없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주장된 신사고 외교에도 잘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이 전개한 다른 국제화 전략의 하나는 자민당이 중심이 되어 실시한 지도(地圖) 관련 임무였다. 이는 쿠릴열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서방국가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세계 각국의 지도에 쿠릴열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기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시도되었으나 각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따라서 국제화 전략은 쿠릴열도에 대한 각국의 역사적 입장을 검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아가 국제화의 위험은 쿠릴열도의 초점이 일·소 관계 개선을 저지하는 장애로부터, 해결 수단의 모색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쿠릴열도의 ‘러시아화’와 ‘일본화’ 경향
최근 쿠릴열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에서는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먼저 러시아는 쿠릴열도에서 ‘쿠릴 사회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진행해 이 지역을 ‘러시아화’하겠다는 구상을 전개하면서 공항, 항만, 병원, 학교 건설과 도로 정비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에 일본인들은 우려를 표시한다. 러시아가 4개 섬을 불법 점거하여 도로, 병원 등 사회자본과 러시아 군의 장비를 증강시키면, 점점 쿠릴열도 불법점거가 강화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쿠릴열도 4개 섬에서 러시아의 개발계획이 진행되면 결국 영토 반환의 장애가 되고, 이들 섬은 러시아 지역으로 남을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통해 쿠릴열도 경제발전을 이루려 한다. 아직 일·러 간 신뢰관계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조약 체결 기한을 설정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니 경제협력, 인적교류, 공동경제활동 등을 통해 신뢰를 구축해야 영토교섭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일본은 쿠릴열도의 ‘일본화’가 영토 반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2016년 일·러 정상회담에서 공동경제활동을 향한 협의 개시나 전(前) 주민들의 고향 방문 제도 개선에 합의한 것은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갑자기 국경선을 새로 획정하는 것보다 먼저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통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섬으로 만들어나가자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구체적으로 6,000명 이상의 전(前) 주민들에게 제한 없는 방문을 허락해주길 기대한다. 지금은 그곳에 방문 가능한 전세 선박이 없고, 있다 해도 한 번에 5~60명밖에 이용할 수 없으니 선박을 늘려 하보마이 항구를 정비하면 전 주민들의 자유 도항이 실현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일본이 생각하는 공동경제활동은 섬의 상황과 산업자원을 잘 살펴보면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쿠나시리의 경우 시레토코(知床)와 자연유산의 일체화를 통해 성게나 조개 등의 양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것들이 영토 반환을 위한 중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난 정상회담에서 쿠릴열도 내 공동경제활동을 실현하기 위한 합의 내용을 보면, 일본은 ‘일본화’를 통해 영토 반환으로 접근해 나갈 기회가 생겼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양국이 전개할 공동경제활동의 주요 내용은 주로 일본이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여 쿠릴열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인데 과연 쿠릴열도의 ‘일본화’가 가능할까? 러시아 측은 ‘새로운 제도’를 어떻게 정의하고 실천에 옮길까? 이는 쿠릴열도에서 일본의 법적 입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달린 문제로 보인다.
성공적인 영토 문제 해결과 남은 과제
일·러 정상회담을 끝내고 일본은 러시아와 본격적으로 공동경제활동을 위한 교섭을 서두르고 있다. 그동안 쿠릴열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4도 반환론이었고 러시아에서 2도 반환론을 주장하다가 일본에서도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2도+α론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반환론 제기에도 진전이 없자 2016년 일·러 정상회담부터 양국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즉, 일·러 양국이 공동경제활동을 통하여 신뢰를 구축하고 그 바탕 위에 평화와 협력의 우호관계, 새로운 법적합의를 이루어 내자는 것이다. 과연 러시아의 적극적인 동방으로의 움직임과 일·러 간 대화 노력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는 일·러 양국의 경제와 정치 문제에 달렸다. 서로가 어느 정도 상대방을 만족시키느냐에 따라 교섭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쿠릴열도에서의 공동경제활동은 시베리아 극동지역 내 경제협력의 구체적 내용이 될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이러한 상호관계는 러시아와 일본에게 이익이 되고, 영토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쿠릴열도를 둘러싼 일·러의 영토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양국의 영토 문제를 역사적 경위에서 보면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에 있다. 일·러 간 체결된 4개의 조약을 통해 계속 국경선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의 경계 문제 역시 미·일·러 3국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20세기 중반 이후 일·러의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양국의 국내 정치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냉전종식 이후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 전개와 함께 진행된 영토 문제 해결은 양국의 입장 차와 국제 환경의 인식 차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제 영토 문제 해결을 ‘경제협력 카드’를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선택하였다. 과거에도 일·러 간 비슷한 방법이 있었으나 서로의 입장 차로 성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앞으로 공동경제활동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