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부터 가을이 찾아온 날, 경상북도 안동에 다녀왔다. 이번 방문은 ‘한국의 기록유산’을 주제로 유교와 관련된 책(목판)이 어떻게 선학(先學)과 후학(後學)을 연결시켰는지 배우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기 위한 답사였다. 답사 마지막 날 방문한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울 만큼 유교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도산서원’을 포함해 ‘하회마을’, ‘병산서원’과 고택 등등... 그리고 안동에 건립된 ‘한국국학진흥원’은 이러한 유교 문화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후학을 위한 배려가 깃든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낙동강 상부에 위치해 있다. 서원의 입구에서 서원으로 들어가려면 안동댐을 옆에 끼고 걸어야 한다. 옛 선비들은 낙동강 옆에 있는 작은 길을 따라 도산서원을 다녔을 것이다. 걷다보면 제일 먼저 강 건너 시사단(試士壇)이 눈에 들어온다. 시사단은 정조가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며 특별히 과거를 치러 영남 인재를 선발했는데, 이 사실을 기념하고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운 것이다. 서원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천광대’와 ‘운영대’도 나오는데, 이는 퇴계 선생이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하던 곳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도산서원 앞 풍경은 수려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도산서원은 낙동강을 바라보는 산 언덕에 위치해 있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이 있어 위계질서가 잡힌 느낌이다. 건물 하나뿐 아니라 전체 구성에서도 유교의 덕목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엄숙함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알고 보니 1970년대 보수 과정에서 담장을 높게 만드는 등 정화사업을 벌여 보다 권위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하는데, 도산서원이 관광지의 모습만 강조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낙향 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명종 16년(1561)에 설립한 것. 지금은 도산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에 건립되어 추증된 것인데,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선조 7년(1574)에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교육 시설을 중심으로 배향 공간과 부속 건물이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이 되는 전교당(典敎堂)은 서원의 강학건물로 선조의 명을 받아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편액이 걸려있다. 전교당의 동, 서에는 각각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광명실(光明室)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동안 머문 동·서재의 건물이 있다. 광명실에는 퇴계가 소장하던 책과 서간집, 왕이 내려준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전교당 동쪽에 있는 장판각(藏板閣)은 퇴계의 문집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이처럼 서원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곳인 동시에 도서관의 구실도 했으며, 보관하는 책을 바탕으로 또 다른 책을 엮어내는 출판사의 역할도 했다.
전교당 위쪽으로는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월천의 위패를 모셔 놓은 상덕사(尙德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외에도 도산서원에는 서당의 식사를 준비하던 하고직사(下庫直舍)와 서원의 식사를 준비하던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고, 앞에서 말한 동재와 서재 외에도 도산서당 권역의 역락재(亦樂齋), 농운정사(隴雲精舍) 등 제자들을 위한 기숙사가 많다. 서원 곳곳에 후학들을 위한 선학들의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공간의 연결고리가 된 목판과 유교문화박물관
도산서원에서 나와 한국국학진흥원 부속기관인 유교문화박물관으로 향했다. 유교문화박물관은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으로부터 기탁 받은 자료를 체계적으로 조사, 수집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고문서와 고서, 목판을 중심으로 유교가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했는지 개인, 가족, 사회, 국가의 단위로 보여준다. 조선시대 유교 성리학 문화는 당대의 경제, 대중문화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제도 하에서 유교의 가르침은 현실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삶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적 질서와 생활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상들은 후학에게 학문을 전승시키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 대량 인쇄가 용이한 목판에 기록을 남겼다.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 등으로 위기에 처한 목판을 포함해 유교 자료를 보존, 관리하고 있다. 과거 목판을 제작하고 책을 편찬하는 것은 개인이나 문중이 독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비용이 필요했고, 이는 유교가 지향한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했다. 책을 편찬하는 비용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분배하여 부담한 것이다. 유교 목판은 선학과 후학,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적인 연결고리이고, 공간적으로는 문중, 서원, 나아가 지역사회까지 연결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든 매개체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선학과 후학이 만나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실제로 퇴계 이황은 30살 이상 어린 이이와 학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이이의 견해를 높게 평가했고, 그 속에서 조선의 성리학은 꽃을 피웠다. 사학과 답사는 역사의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며 배운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학과 구성원인 교수님과 선·후배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는 기능도 있다. 유교의 덕목인 공동체 의식을 답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학과의 꽃은 답사라고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