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동북아역사재단 뉴스〉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재단의 활동성과를 점검하고, 재단의 발전을 위한 고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번 호에는 현대일본학회 초대회장과 한국정치학회 회장을 지낸 한배호 전 고려대 교수에게 한국과 일본의 정치 및 외교 관계를 전망하고, 향후 재단의 발전 방향에 관한 조언을 듣는다.
한배호 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 중앙대 · 고려대 교수와 고려대 대학원장, 현대일본학회 초대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통일원 정책자문위원장, 세종연구소 소장, 유한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저서로 《이론정치학》, 《한국현대정치론》, 《한국정치변동론》, 《세계화와 민주주의》 등 다수가 있다.
Q. 교수님, 먼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최근 관심사나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요?
한배호 아무래도 나이(만 85세)가 있다 보니 무엇보다 건강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매주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종종 지인들과 모임도 갖고 있지요.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책을 읽고 글도 쓰는데, 요즘은 정치학 관련 책보다는 고전 철학이나 신학 쪽과 관련해 예전에 놓쳤던 책, 좋았던 책들을 위주로 보고 있습니다. 정치학은 이제 젊은 사람들이 연구를 이끌어 가야 할 때라, 몇 년 전 《자유를 향한 20세기 한국 정치사》(2011)와 개인 회고록 《민주정치라야 정치학이 산다》(2013)를 발간한 후로는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은 관련 학회의 초청이 있어 지난해 한일관계 50주년 기념 학술회의 때 기조강연을 했고, 올해는 지난 8월 23일~25일 현대일본학회 학술회의에 다녀왔는데, 좋은 논문들이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Q. 여든이 넘어서도 책을 발간하실 정도로 정치학에 대한 열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그간 연구해 오신 분야나 집필한 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요?
한배호 그동안 쓴 책이 다해서 열 권쯤 되는데, 이중 한국 정치를 다룬 책이 5권 정도입니다. 《자유를 향한 20세기 한국정치사》는 엄밀히 말해 연구서라기보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시각에서 한국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수립 과정이라든가 한국 전쟁, 4.19, 5.16 등을 중심으로 사건의 발생 원인 및 결과를 정리하면서 전제적인 흐름을 보고자 했던 책이에요. 3년 전 발간한 회고록은 그간의 내 생애와 집필한 책들을 리뷰하면서,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국 정치 현실을, 일종의 참여 관찰자로 보아 온 정치학자가 쓴 학구적 대화랄까. 아무래도 학자로서의 삶과 한국 정치사를 정리한 두 권의 책이 가장 애착이 간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Q. 현대일본학회와 한국정치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학계에 대한 평가와 후배 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배호 나는 비교정치의 방법론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교정치 이론을 다루면서 구체적 연구대상으로 잡은 것이 한·중·일 3국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중국은 교류가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한·일 양국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를 볼 때, 우리가 일본을 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978년 현대일본학회를 발족했어요. 당시 한 10명 정도가 사비를 털어 모임과 연구 발표를 하는 소규모 단체로 시작했는데, 몇 년 뒤 회원들이 늘면서 큰 학회가 되어 어느 덧 창립 40주년을 앞두고 있네요. 그동안 상당히 많은 성과를 거두고 발전을 이룬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후배 연구자들에 대한 당부라기보다는 1970,80년대만 해도 일본을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이후에는 일본에서 학위를 받고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다양한 시각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를 하게 된 건데, 난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학문을 연구할 때는 개방적이면서도 다양한 관점과 방법을 가져야 하거든요. 또 하나 연구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연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학문을 통해 한국 사회와 한·일 양국의 관계발전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에 대해 실천적, 실용적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Q. 오랜 기간 일본의 근대화와 정치에 대해 연구하셨는데, 현재 일본의 정치 행태에 대해 평가해 주신다면?
한배호 나는 개인적으로 종전 이후 일본의 정치체제가 진화해왔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일본은 종전 이후 정치 체제가 군사 대국으로 나아가는 것을 제한하면서, 경제만 발전시켜 온 나라거든요. 또 기본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를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천황제를 유지함으로써 상당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보수 체제가 일본 사회를 통치해 올 수 있었죠. 그러다가 지금의 아베 정권이 들어선 뒤 이른바 ‘평화헌법’ 문제를 제기한 건데, 이는 결국 자위대를 정규 군대로 개편시키면서 일본이 자신들의 경제력에 맞먹는 군사력을 갖추겠다는 움직임이거든요. 다시 말하면 ‘과연 경제대국을 이룬 나라가 군사대국이 되지 않은 채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명제에 대한 문제인 거죠. 지금까지의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경제대국이 군사대국이 되지 않은 예는 찾기가 어려워요. 지금의 상황에서 본다면 일본의 미래가 우리에게 상당히 우려스럽지만, 조심스럽게 주시하면서 나름대로 대응책을 마련해 가야죠.
또 하나 일본을 연구할 때 가장 초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역시 정당이에요. 정당 내 여러 파벌 관계, 총리를 중심으로 한 관료들, 재벌들, 이 삼각관계에서 누가 권력을 많이 갖느냐와 권력의 바탕이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조정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느냐 하는 과정... 이 과정을 통해 일본의 변화를 잘 살펴야 할 겁니다.
Q. 한 · 일 양국에는 역사 인식 문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이 놓여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양국 관계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한배호 현 정부 들어서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에 있어 하나의 아젠다로 올려놓았는데, 지난해 말 양국 외무장관이 참석한 자리에서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일본은 이것으로 사실상 합의가 종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니 총리가 직접 나서서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죠. 나는 이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될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아마 일본도 이 문제가 빨리 풀릴 거라고 기대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이 진심으로 성의를 보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죄의 조건들을 내걸기보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민(compassion)’을 갖고, 인권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며 피해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기를 기대합니다.
그와 더불어, 양국이 너무 감정적으로 이 문제에 치우쳐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대로 다루되, 이 문제가 양국 관계에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분에까지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Q. 한 · 일 양국 간 평화공존 또는 역사화해를 위해서는 어떤 정책 혹은 노력이 필요할까요?
한배호 지금 한·일 관계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있죠. 나는 양국의 관계가 아주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어렵고 특수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일본은 정치, 외교, 안보적으로 우리와 상호보완적 이해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난해 한일관계 50주년 기념 학술회의 기조강연에서도 앞으로 양국이 민간교류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지금의 양국 관계는 상업적 관계에 가깝다고 보는데, 앞으로 양국 국민 사이에 깊은 우정을 나누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상당히 한·일 관계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적 아픔과 고난, 비애를 잊지는 않되 용서할 건 용서하고 우호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노력을 해주어야 합니다.
나는 아직도 일본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 깊이가 부족하고, 일본을 피상적으로 아는 연구자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 경제를 연구한다고 하면, 일본의 경제학자 이상으로 일본 경제에 대해 알고, 그들과 견해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물론 그런 연구자들이 점점 많이 나오고는 있지만, 다음 세대에서 그런 노력들을 많이 해주고 정부와 재단도 관련 지원들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Q. 일본 정치 연구 외에 국내 정치에 대한 연구도 오래 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한국 정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고,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한배호 정치를 ‘이념의 정치’와 ‘가치의 정치’, 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본다면 우리나라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영국이나 북유럽 국가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이념의 정치를 하는 반면, 정치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 가치의 정치거든요. 우리나라는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들의 가치관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지역주의, 세대 간 갈등이에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여당은 보다 많은 부의 창출, 야당은 복지주의 정도를 놓고 싸우고 있다고 봐야겠죠.
현재 한국의 정치는 과거 군사독재, 개발독재로부터 벗어나 민주화로의 전환을 이룬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질서로 정착하는 공고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제로섬에 기반한 가치관 간 갈등이 상당히 심각한데, 이러한 갈등 해소법을 어떻게 배워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정치권이 이러한 갈등 해소를 체질화하는 행태가 나와야 국민들도 배워 가는데, 지금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거든요. 이처럼 우리 정치 체제의 성격과 본질이 바뀌는 것이 커다란 과제라고 봅니다.
Q. 정치학자로서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며, 한국의 정치적 수준이 발전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배호 아무래도 민주화죠. 권위주의 집권 세력은 정치를 원치 않고 통치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체제 하에서는 정치라는 것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요. 그렇게 야당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여당이 모든 것을 장악한 채 통치하다가, 선거와 정당 활동,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시 등 여러 민주적 제도와 행동이 허용되기 시작한 것이 ‘민주화’인 것이죠. 말하자면 정치라는 게임의 룰이 자유 경쟁으로 바뀐 것인데, 그것이 곧 정치 발전입니다.
정치 발전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나간 것을 정치 발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아직 더 발전해 가야 할 부분이 많죠. 어떻게 하면 국민의 요구가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통해 정부에 전달되고, 이것이 정책에 반영되어 실현될 수 있는가가 가장 이상적인 민주체제거든요. 이러한 민주체제의 정착을 100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아직 40 정도 수준밖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Q. 재단이 출범한 지 10주년이 되는데, 재단 발전을 위해 조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배호 글쎄, 내가 동북아역사재단을 세미나 참석 차 몇 번 방문했고 재단 내 몇몇 일본 관련 연구자들도 알지만, 그렇다고 재단의 발전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할 만큼 잘 아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자꾸 옛날 얘기를 꺼내서 그렇긴 한데, 내가 고려대 교수로 있을 때 아시아문제연구소 일본연구실장을 약 13년간 담당하면서 일본 연구를 활성화하려고 일본에서 관련 도서도 많이 구해 오고, 일본 학자들과 교류도 추진했었거든요. 그 때만 해도 국내에 무슨 연구 지원단체 같은 게 있었나... 그래서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참 애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이제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역사 연구 전문기관이 생겨서 벌써 10년이 흘렀다고 하니, 앞으로도 한·일, 한·중 관계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더욱 건승하는 재단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