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말 냉전 종식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역사’가 중요한 국제정치의 변수로 등장하였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역사왜곡작업을 통해 자국 영토 내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편입시켜 소수민족 분리 독립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고, 일본 또한 20여 년간의 경제 침체로 인한 여론 악화를 무마하고자 20세기 전반 침략 제국주의 역사를 미화시키는 국수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아울러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토라는 황당한 주장을 국제사회에 퍼트리고 있다.
이에 대응해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우리 재단을 설립하여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바른 역사 정립을 통해 이 지역의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모색하고자 노력해왔다. 재단은 지난 10년간 다양한 노력을 통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도발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왔지만,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2015년 9월 김호섭 이사장의 취임 이후 재단은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사회에 우리의 입장과 연구 성과를 보다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동시에 서구 석학들과의 대화를 통해 동아시아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는 다양한 학술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성과가 2016년 4월 5일 미국 UC버클리대에서 열린 학술세미나라 할 수 있다.
재단은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갈등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UC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와 공동으로 “동아시아의 역사와 정치 : 평화와 갈등에의 함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한국과 미국의 동아시아학 연구자 28명이 참석하였는데, 우선 재단의 김호섭 이사장, 유의상 국제표기명칭대사, 최운도 한일관계연구소장, 그리고 필자가 참가하였으며, 국내에서는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 박태균 서울대 교수 등 8명이, 그리고 미국에서는 토마스 골드(Thomas Gold) UC버클리대 교수, 다니엘 스나이더(Daniel Sneider) 스탠포드대 교수, 존 켐벨(John Creighton Campbell) 미시간대 명예교수 등 16명의 석학들이 참가하여 통찰력이 돋보이는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역사적 맥락 속에 뿌리를 둔 동아시아 영토 갈등
회의는 동아시아 역사와 안보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총 3개 세션에서 10개의 발표와 토의를 진행하였다. 우선 제1세션에서는 ‘동아시아 영토문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서울대 박태균 교수는 개화기 일본의 대외 자립정책 추구와 서구 따라잡기 정책이 이후의 한중일 관계에 깊은 갈등의 골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상호관계는 영토 문제에도 깊이 투영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토마스 골드 UC버클리대 교수는 중국의 영토 관련 주장이 공산당의 정통성 약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이 경제발전 성과 이후 공산당의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설득력을 잃자 민족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일당독재를 지속하고자 하고 있으며, 아울러 민족주의 고양을 위한 역사 재해석을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2세션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서 역사문제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는데, 성균관대 김태효 교수는 자신이 청와대 안보보좌관 시절 겪은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의 체결 실패 사례를, 다니엘 스나이더 교수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합의에 있어 미국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였다. 특히 스나이더 교수는 미국에 존재하는 세 가지 신화를 설명하였는데, 첫째 미국은 전쟁의 역사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미국은 다른 나라의 역사 문제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다는 점, 그리고 셋째 그 문제들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더 이상 사실이 아님에도 아직 미국은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문제 해결과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강인선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2000년대 초반 미국학자들의 시각과 오늘날 이 자리에 모인 학자들의 시각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이전에는 역사갈등 문제를 단순한 감정의 문제라거나 비즈니스처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역사 문제를 정책결정과정에 있는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미국학자들이 동아시아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미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논평하였다.
한·중·일 안보협력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역사갈등
오후에 열린 제3세션에서는 ‘한중일 정치에서의 역사’를 중심으로 발표가 이루어졌다. 국립외교원 김한권 교수는 중국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키기 위한 역사의 활용이 국내 다민족 통합이라는 미션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딜레마 상황에 대해 설명하였다. 연세대 손 열 교수는 한일관계가 정치, 경제, 역사가 상호작용하면서 각국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국내 정치가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설명하였다. 재단의 최운도 한일관계연구소 소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한국과 일본의 정체성이 양국 관계를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우익적 사고가 한국의 존재론적 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하는 구도임을 주장하였다. 특히 냉전기에는 안보 위협이 역사인식을 압도함으로써 한일 역사갈등이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나 양국 간 국력 차가 줄어든 21세기에는 역사갈등이 양국의 안보협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재단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 안보, 외교 및 영토의 문제는 역사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이론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확인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동시에 동아시아의 역사 갈등은 쉽게 봉합되기 힘들며 따라서 장기간 체계적인 연구 및 학술교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 과제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재단과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는 매년 국제 학술회의를 공동 개최하기로 약속하고, 함께 참가한 스탠포드대의 관계자와도 논의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재단은 미국 내 저명한 동아시아 연구자들에게 ‘동북아역사재단’의 존재를 알림과 동시에 장기적인 학술교류 및 네트워크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