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은 조선 국왕 고종이 약 1년간(1896년 2월 11일∼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사건이다.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 사건은 명칭의 유래 못지 않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건양(建陽) 원년(1896)을 회고한 독립신문(獨立新聞) 1896년 12월 26일자 논설에서는 "파천"이라는 용어 대신 "이어(移御)"라고 쓰고 있다. (《고종실록》(34권)에는 '파천'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이필(移蹕)'이라고 했다.(이태진, 「근대 서양정치제도 수용의 역사적 성찰」, 『진단학보』(84), 1997))"… 이월 열하루 날 대군주 폐하께서 위태하심을 이기지 못하셔서 대궐을 떠나시고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하셔서 러시아 공사에게 보호를 청하신즉 …." 결국 '아관파천'이란 용어는 훗날 붙여진 명칭으로 볼 수 있는데, 언제부터 쓰인 것인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이는 '아관파천'이 누구나 알지만 깊이 알지 못하는 역사적 사건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극적인 요소로 포장한 신화가 역사보다 먼저 눈에 띄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다. 고종과 태자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어스름한 새벽 경복궁을 빠져 나온 일, 고종이 기일이면 공사관에서 경운궁을 드나들었던 일, 그리고 신임 러시아 공사와 물러나는 공사가 '아관파천'을 전후하여 두 달간 러시아 공사관에 함께 머문 일 등이 그 예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아관파천'의 신화를 역사로 옮기는 작업에 일조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관전 점에 초점을 맞췄다. 하나는, 왜 러시아가 한국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였는가? 다른 하나는 고종이 서울 주재 여러 외국 공사관 가운데 왜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는가? 이다.
러시아가 한국 문제에 개입하게 된 까닭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미처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과 무력충돌이라는 위험부담이 있는 한국 문제에 개입한 배경에 관해서는 러시아 사료에 접근이 쉬운 러시아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른바 러시아 정부의 '사후 승인론'이 그것이다. 1896년 1월 10일 신임공사 슈페예르(А.Н.Шпейер)가 서울에 부임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베베르 공사와 약 두 달간 서울에 함께 있을 동안 고종의 신변보호 요청을 먼저 수락한 후, 고종의 이어 후 본국 정부에게 추인을 받았다는 주장이 그 요지다. 통신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현지 공사들이 선 조치, 후 추인 받았기 때문에 본국 정부의 사전 개입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 '사후 승인론'은 과연 타당할까? 이는 인접 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갈등을 줄이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러시아 외무성 자료들을 보면, 수긍이 간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에서 부동항을 획득하고자 했던 러시아 해군성 자료들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대외정책은 외무성 뿐만 아니라 육군성, 해군성, 재무성 역시 제 목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의견에도 귀 기울여야 제대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특히 러시아 해군 당로자들에게 한반도 문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 1887) 사건이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해군성에서는 이 사건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양으로 진출하는 사실상 유일한 출구인 대한해협 봉쇄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르 정부는 현상을 변경할 기회가 오면, 대한해협에서 거제도나 마산포를 획득하여 대양으로 자유항행권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상정하고 있었다.
러시아에게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한 사건은 청일전쟁이었다. 차르 정부가 거제도 점령의 당위성을 공식 거론한 것도 일본이 승전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열린 제2차 동아시아문제 특별회의(1895년 2월 1일)였다. 회의에 제출한 외무상 보고서는 "청일 강화협상이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얻는 이익을 침해할 경우 첫째, 대한해협에서 자유항행을 보장받기 위해 거제도를 점령하고 둘째, 그곳에 홍콩의 영국 해군기지와 유사한 러시아 조차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에 1895년 4월 6일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Николай) 2세 는 외무상의 상주서에 "러시아와 해안선으로 연결된 한반도 동남부에 부동항을 획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한국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1895년 7월 중순 조선을 방문한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관 알렉세예프(А.И.Алексеев) 제독이 해군상 티르토프(П.П. Тыртов) 제독에게 보낸 기밀 보고서(1895년 7월 21일)는 차르 정부가 대한정책을 매우 구체적으로 세워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알렉세예프 제독은 서울에 도착한 7월 13일, 고종이 보낸 한국군 장교에게 국왕을 알현하도록 제의 받았다. 당초 고종 알현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제독은, 주한공사 베베르의 조언에 따라 급히 제물포로 사람을 보내 예복을 가져오도록 하여 7월 15일 고종을 알현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 장교 4명을 대동한 태평양함대 사령관을 접견한 고종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한국에게 러시아 황제의 우의와 신뢰는 매우 소중하며, 베베르(К.И.Вебер) 공사는 가장 믿을 수 있는 국정 자문관"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알렉세예프 제독이 "러시아는 바로 지금 한국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만 한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타전한 이유였다.
한반도에서 부동항을 획득하려는 계획은 태평양함대 증강사업과 맞물려 있었다. 이는 러시아 해군성이 7개년(1896~1902) 건함사업에 매년 추가 예산 7백만 루블을 배정받음으로써 구체화되었다. 더욱이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피터(Петр) 대제와 에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여제가 발트해와 흑해로 나가는 출구를 획득함으로써 러시아를 유럽 세계와 긴밀히 연계시켰던 것처럼, 시베리아를 유럽 러시아와 긴밀히 결부시키고 태평양쪽 출구를 확보하는 일이 자신이 부여받은 역사적 사명이라 여기고 있었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이 같은 세계관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전멸할 때까지 동아시아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간 추동력이었다.
특히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통해 한국 침탈 계획을 적극 시도하였음에도 차르 정부는 1895년 12월 1일에 열린 동아시아문제 특별회의에서 부동항 획득에 관한 결연한 의지를 재확인하였다. "태평양함대가 중심이 되어 일본의 침략야욕을 저지한다"는 기본 방침이 수립됨으로써 함대의 성공적인 작전수행을 위해 동해나 황해에서 부동항을 획득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다. 1895년 12월 태평양함대 사령관 알렉세예프 제독이 순양함 두 척을 이끌고 거제도와 마산 인근해안탐사를 실시한 것도 이 같은 부동항 획득 계획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러시아 황제가 한반도 부동항에 쏟은 관심은 한국 내정에 적극 개입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해군참모총장 크레메르(Кре мер) 제독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극동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통합함대 사령관 티르토프(С.П.Тыртов) 제독에게 주한공사 베베르를 최선을 다해 지원하도록 지시(1895년 12월 5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따라서 주한 러시아 공사 슈페예르가 기밀전문(1896년 2월 12일)을 통해 "국왕이 왕세자와 함께 조만간 공관으로 피신할 계획임을 비밀리에 알려온 바, 이에 동의했음"을 보고하자, 차르가 "우리 전함 가운데 가장 큰 전함을 제물포로 파견하기 바란다"고 결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로서도 고종이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을 허용하면 일본과 충돌없이 조선에서 일본 세력을 제거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공과 태평양함대 증강사업이 완료될 시기에 한반도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한 사전 포석이기도 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간 까닭
1895년 2월 러시아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을 예상하고 거제도에 주목하였을 무렵, 고종은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설계하고 있었다. 그 설계도는 1895년 2월 2일(음력) 고종이 발포(發布)한 교육조칙(敎育詔勅)의 입국 이념에 투영되어 있었다. "백성들이 교육받지 않으면 국가는 공고해지기가 매우 어렵다. 이 세상의 형세를 돌아보건대, 부강하여 독립 주권을 행사하며 남보다 앞서는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 백성들의 지식이 깨어 있다. 지식이 깨어 있다는 것은 교육이 잘 이루어진 것이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전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이 핵심 강령이었다. "글을 읽고 글자를 익히되 옛사람들의 찌꺼기만 주워 모아 세상 형편의 큰 판도를 모르는 자는, 그 글 솜씨가 비록 고금에 당할 자가 없다 하더라도 한갓 아무 쓸모없는 서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고종은 "왕실의 안정은 그대 신민들의 교육에 달려 있고, 국가의 부강도 그대 신민들의 교육에 달려 있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 같은 교육입국 이념에 따라 교사 양성을 위한 한양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관제(官制)를 반포(1895년 4월 16일)하여 근대적 학교 법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구상은 명성황후 시해[을미지변(乙未之變)]를 자행한 일본 때문에 좌절되었다. 청일전쟁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의 대한정책과 고종의 교육입국 구상은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을미지변 이후 고종은 친일 관료들 손에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이면서 개혁정책은 추동력을 잃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신변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신정부 구성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도움을 받을 것인가? 고종은 특정 열강 일국[一國]에 의지하기보다는 열강의 공동보호를 도모하는 다변외교를 견지했다. 이는 고종이 베베르 공사에게 전달한 친서(1895년 11월 20일)에도 잘 나타난다. 서울에 수비대를 보유하고 있는 영국, 러시아, 미국 공사들에게 궁궐 경호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고, 이를 위해 공관 경비병력 가운데 50명씩 파병해줄 것을 공식 제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베르 공사는 열강의 공동보호 방식보다는 일국에게 보호받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고종을 설득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차르 정부의 한국 문제 개입정책을 현지에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 문제를 베베르와 거래를 통해 해결했다. 베베르의 조언을 수락하는 대신 러시아 공사관 수비대가 국왕을 경호할 수 있도록 본국 정부에게 승인을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를 통해 국내 정국을 을미지변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자 했다. 한국을 근대 자주독립국가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개혁의 고삐를 바짝 당기던 그 시절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기 전날(1896년 2월 10일) 미국 공사관 비서 알렌(H.N. Allen)에게 특사를 보내 과연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고종이 알렌에게 자문을 구한 것은 한국 내정에 미국도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고종식 이이제의(以夷制夷) 정책'인 셈이다. 고종은 이를 통해 미국이 러시아 공사관 이외 다른 대안을 제시해 주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종이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을 포함한 여러 외국과 10년 넘게 교류했음을 고려할 때, 만약 그에게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면 반드시 러시아 공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한국 문제에 개입불가 방침을 고수했다. 이 같은 방침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고종은 친일내각을 붕괴시키고 정국 전환에 성공했다. 이후 고종은 조선의 국체를 대한제국으로 바꿔 근대 개혁을 본격 추진한다. 그렇지만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주도한 광무개혁은 러일전쟁을 기화로 한국을 침략한 일본에 의해 또 다시 스러지고 만다.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일본이 물러날 때까지 우리는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재단은 "21세기 아관파천의 재조명 : 한러 관계와 한국 외교의 미래를 묻다" 주제로 2016년도 첫 학술회의(2월 3일)를 개최하였다. 누구나 알지만 깊게 알지 못했던 '아관파천'과 관련된 여러 주제들을 폭넓게 다루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 회의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는데 참석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