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은 동아시아 역사·영토 관련 국내외 학자 간 공동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영향력 있는 해외학자를 재단에 초청하여 일정기간 연구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방민호 교수는 지난 9월부터 근대 한중관계사를 주제로 재단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재단 김정현 연구위원이 방민호 교수를 만나 청나라 말기 대조선 정책을 결정하는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인 이홍장(李鴻章)과 청일전쟁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_편집자 주
방민호(方民鎬) 교수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과학자연합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현재 연변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 근대 대외관계사와 한중관계사이며 대표저서로는 《중조일관계사(中朝日關係關係)》(2000), 《이홍장 대조선 정책 연구(李鴻章對朝鮮政策硏究)》(2013) 등이 있다.
Q 김정현 한중관계사가 핵심 연구 분야인데 근대 한중관계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나 계기는?
A 방민호 대학시절부터 중국근대사를 선호했고 관련 수업을 더 열심히 공부해 왔다. 대학에 교수로 부임해 처음 지도를 맡은 교과목도 중국근대사였다. 중국 개방과 함께 근대 대외 관계사를 중시하는 학계 흐름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더욱이 1980년대부터 동북아 국제관계사 연구방향이 전문적인 연구 분야로 급부상하면서 이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해졌고, 연변대학교는 중국사학계에서도 한국사 연구분야가 우세한 편이라서 근대 한중관계사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Q 김정현 《이홍장 대조선 정책 연구》를 출간했는데 이홍장은 한국 근대사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함께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들어 본 청나라 역사인물이다. 중국 학계에서 이홍장에 대한 평가는?
A 방민호 이홍장은 청나라를 대표하여 중국 근대시기 많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런 이유로 1970년대까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역사 연구에서 객관성·합리성이 강조되면서 긍정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지향하고 추진한 정치가·실천가로서 이홍장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청조는 몰락하던 상황이었고 서양 열강의 침략 속에서 외교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불평등조약 체결은 그 당시 청 왕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 역시도 이홍장은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최초로 근대화를 구상하여 실천하려 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역시 중국 왕조 몇 천년 동안 이어진 봉건 정치제도와 전통문화 이념에 깊이 젖어 있던 인물인 만큼,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구체적인 구상을 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동시에 당시 중국의 현실도 새로운 시대와 사상을 용납할 만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홍장도 국가정책을 집행하는 관료 중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며 여러 조약을 체결했지만 결국 중국이 반식민지가 되어가는 현실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역사 인물들이 하는 역할은 궁극적으로 시대와 역사의 구조적인 한계에 묶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유감이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 이홍장 연구의 제일 큰 성과는 2008년에 출간한 《이홍장 전집》이다. 이 책은 중국 내외에 흩어져 있던 이홍장의 모든 문헌자료를 수집해 14년간 정리한 자료로, 총38권, 2,80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이 30%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한국 학계에서도 근대 한중관계사 연구나 중국근대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Q 김정현 이홍장은 상당기간 중국의 조선 정책을 결정하고 조율한 사람이다. 당시 그가 구상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의 정책이 조선의 근대화나 조·청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가?
A 방민호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인 정치가는 대부분 사상가이자 철학자였다. 하지만 이홍장의 일생을 보면 그는 아주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정치가였다. 때문에 그의 문헌이나 관련기록에는 현실을 떠난 장황한 연설이 보이지 않는다. 이홍장에게는 실제적인 정세파악과 문제 해결을 위한 실무가 급선무였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수천 년 동안 접하지 못했던 강적을 맞아, 수천 년 동안 겪지 못했던 급격한 변화에 직면했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 외에 특별히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체계적으로 구상하지는 못했다. 1860~1870년대 초기에는 일본과 함께 서양에 맞서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었지만, 187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의 침략이 이어지자 포기하였다. 서세동점 이후 열강들의 침략을 받는 상황에서 청조의 국력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정치가들에게는 청조를 어떻게 지탱해나갈 것인지가 급선무였다.
당시 정계 인물인 짱페이룬(張佩綸)은 이홍장의 외교를 "조선은 무마하였으나 일본은 꺾지 못하였으니 맹주는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이홍장의 대조선 정책은 당시 쇠약해 몰락해가는 청조의 현실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국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Q 김정현 중국의 조선 정책이 처음에는 자주외교를 강조했다가 식민지 간섭으로 나아갔다. 임오사변 때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하는 등 일일이 간섭했다. 이를 보면 청도 점차 당시 국제사회의 대세인 제국주의적 관계로 한·중 관계 변화를 꾀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A 방민호 봉건시대 청과 조선 관계의 최고 핵심 이념은 전통적인 사상문화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천하일가(天下一家), 상하유서(上下有序)다. 때문에 중국은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 서양 열강이 개입하면서 전통적 관계가 근대 지정학적인 안전이익 관계로 변모한다. 이러한 큰 흐름 속에서 이홍장은 조선이 청의 핵심지역 안전을 위한 최전선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중국 본토 변방지역보다 조선을 더 중시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조선을 통해 중국 침입을 시도하였고 당시 침략 의도를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것이 이홍장이 인식한 일본의 조선 정책이다. 그는 일본의 조선 정책이 청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면서 청의 조선정책을 조율했다. 즉 당시 일본은 청이 조선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는 지렛대였던 것이다.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청도 점차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간섭하며 강압적인 태도로 변했다. 결국 전통적인 청-조선 관계의 핵심 이념은 변질되었지만 이홍장은 여전히 그것이 전통적 종속관계를 강화하는 것이고 조선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청이 일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수록 청의 조선 정책이 강압적인 통제정책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청조가 봉건 왕조를 근근이 지탱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국주의적인 관계를 꾀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Q 김정현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청일전쟁 전 한중관계사를 연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청일전쟁 전과 청일전쟁 후 한·중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간단히 설명해 달라. 또 청일전쟁 연구 권위자로서 청일전쟁 120주년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A 방민호 청일전쟁 전에 한·중 관계는 전통적 종속관계인 책봉-조공관계 허실 속에 있었다. 청은 조선의 정치·경제·외교·군사 모든 면에서 간섭하고 통제했다. 청일전쟁 후에는 종속국가라는 허실도 완전히 끊어지고 강압과 간섭으로 얻을만한 내실도 없어서, 점차 국제법적으로 평등한 근대적 국가 관계를 모색했다. 더 나아가서는 독립운동이나 의병활동,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설립 등 일본을 비롯한 외세 침략에 공동으로 맞서기 위해 공조하는 관계가 되었다.
120년 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로 보았을 때,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즉 1894년 청일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근대시기 한·중·일 3국 관계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든 변하였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 120주년을 기념해 학술회의와 여러 기념 활동이 있기는 하지만, 청일전쟁이라는 사건이 중국 사회에서 어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당시 세계추세와 시대변화를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확실한 발전과 실력을 구축하지 못한 부분을 성찰해야 한다는 중국 내 논의가 있다. 또 청일전쟁이 비단 청-일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고 조선 영토에서 일어난 전쟁인 만큼 당사자인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한국학계의 지적에 동의한다.
Q 김정현 최근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역사인식 퇴행으로 동북아시아에 역사와 민족주의, 영토문제 갈등이 커지고 있다. 바람직한 미래 건설을 위해서는 이러한 갈등과 민족주의 열풍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와 관련하여 중국과 주변국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가?
A 방민호 동아시아라는 지역에 같이 속해 있으면서 오랜 역사와 문화전통을 교류해 온 3국 사이에 갈등이 커지는 것이 아쉽다. 일본의 우경화도 일부 보수세력의 정치적인 경향일 뿐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제일 큰 문제는 인류의 기본 인권을 침해한 것인데도 일본은 그것을 한국 민족, 중국 민족 사이에만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 난징대학살도 학살당한 사람 수를 문제 삼고 있는데 그런 논쟁은 중요하지 않다. 근본 문제는 일본이 과거에 인류 보편적인 도덕성과 이념을 저버린 때가 있었다는사실이다. 일본이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에 표면적으로 사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일본이 인류의 기본 권리를 침해한 과거를 인정한다면 주변국도 일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역사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Q 김정현 한·중 간 유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등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상호이해 부족으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어떻게하면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A 방민호 모르는 사람끼리는 갈등도 있을 수 없다. 교류가 늘어나면서 겪는 갈등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교육 분야와 민간에서 더 많이 교류한다면 서로 이해하는 폭도 점차 넓어질 것이다. 중국 내 조선족들도 많이 변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성장한 젊은 조선족들은 더욱 자주적이고 개성을 지향한다. 또 중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국가인식도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감안하고 존중한다면 서로 오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Q 김정현 재단에서 연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 남은 기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또 동북아역사재단이 주목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린다.
A 방민호 오기 전부터 중국의 주요 신문인 〈인민일보(人民日報)〉, 〈환구시보(環球時報)〉 등을 통해 석동연 사무총장의 글과 강연, 인터뷰를 많이 보았는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분쟁을 부추기는 연구보다 화합·교류를 위한 연구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다. 짧은 기간이지만 방문학자로 있는 동안 동북아역사재단을 가까이 접하면서 역사 갈등을 극복하고 동북아지역의 현실과 미래 화합을 추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
앞으로 재단에서 추진하는 핵심과제들을 계속 연구하면서도 더욱 큰 틀에서 체계적인 연구 과제를 선택해 외국학계와 함께 공동 추진했으면 좋겠다. 특정 사건에 국한한 연구보다 일정 시기 한·중 관계 등 큰 틀에서 한·중·일 3국 등 동북아시아 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연구한다면 좋은 연구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재단이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한 길을 개척하는 공동연구의 선구자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