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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의 변동 고구려-수·당의 정면 충돌, 동북아를 재편하다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임기환

지난 2월 24일 미국UCLA 한국학 연구소와 재단의 공동 주최로 LA한국문화원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회의 ‘고구려와 그 이웃들 :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발표 논문 중 서울교육대 임기환 교수의 ‘고대 동북아의 국제질서 - 4~7세기를 중심으로’의 글을 세 차례로 나누어 요약 게재 한다. _편집자 주

글 싣는 차례
① 4세기의 동북아의 국제질서
② 5~6세기 동북아 국제정세
③ 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의 변동

7세기에 들어 수와 당에 의해 중원이 통일되면서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크게 변동하였다. 수와 당은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대외 정책을 추진하였다. 수나 당이 통일제국으로서 책봉·조공의 형식을 통하여 관철하려는 세계 질서는 기존에 고구려나 백제가 갖고 있던 책봉·조공관과는 현저히 달랐다. 여기서 이념적으로 고구려와 수·당의 정면충돌이 예상된다. 그런데 남북조 시기의 책봉·조공질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던 신라는 기왕의 책봉·조공 관계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나 당이 요구하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책봉·조공관이나 국제 질서를 손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수·당에 대한 강경한 외교정책이 고구려로서도 유일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못한 배경에는 5세기 이래 과거 고구려 세력권을 재건하려는 복고적 집착도 깔려있다고 짐작된다. 그리고 고구려가 신라나 백제를 동맹관계로 만들지 못한 데에는 4세기 이래 지속된 삼국간의 전쟁과 갈등관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중원 세력의 움직임이 동북아 정세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동북아 독자의 국제관계의 범위가 해체되고,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력 변동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 결과 7세기에는 고구려 및 동북아의 여러 세력과 중원 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고 그 강도도 격화되었다는 점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면이었다.

한반도의 경우 고구려의 주도권 약화와 신라의 성장은 삼국간의 항쟁을 더욱 격렬하게 촉진하고, 나아가 이러한 삼국의 항쟁에 중원세력이 개입될 개연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즉 중원세력의 입장에서는 적대세력과 동맹세력을 구분하고, 이를 통한 국제질서의 재편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이는 당대에 현실화된다. 돌궐의 경우는 내부 분열과 수의 공벌로 일찍이 그 세력이 약화되어 과거 유연 등 북방세력이 가졌던 위협성을 중원세력에게 보여주지 못하였다.

돌궐과 고구려의 세력 약화는 遼海지역에서 거란·말갈 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서서히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게 되었고, 후일 고구려 국가의 해체는 거란과 말갈의 성장을 촉진하여 이들 제종족의 역사적 활동이 향후 크게 달라졌던 것이다.

신라·백제·왜·말갈·거란의 성장

왜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정세변동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전통적으로 백제와의 교섭이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수의 등장 이후 새로이 고구려와 왜의 외교관계도 밀접해졌으며, 왜 역시 한반도내의 정세 변동에 연관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백제 멸망 직후 이 전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왜마저도 663년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어 백촌강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 좋은 예이다.

이처럼 신라·백제·왜 등 주변 제국은 물론 거란·말갈 등이 성장하여 이들이 갖는 국제적 위상이 달라지면서 고구려와 당 전쟁 과정에서는 수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전쟁의 당사자나 참여자가 대거 늘어났다는 점이다. 본래 이 전쟁의 기본 축은 당과 고구려이지만, 당이 돌궐·거란을 동원함으로써 다수의 세력집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더욱 660년 백제 정벌전 부터는 신라가 이 전쟁의 또 다른 중심축을 맡음으로써 전쟁 수행의 주체가 확대되었음은 물론 이제 전쟁의 기본 성격이 달라졌다.

한편 이와 같은 정세 변화 속에서 당을 중심으로 주변 제국가의 역관계가 이전보다 깊은 연관을 갖고 전개되고 있었다. 즉 동아시아 전체의 국가 간에 전개된 외교 전략과 전쟁에서 연동성이 훨씬 깊어진 것이다.

당의 대고구려전이나 대신라전의 경우에도 대체로 북방과 서역의 정세와 직간접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 670년을 전기로 하는 신라의 당에 대한 공세는 서역의 정세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었다. 당이 660~670년 초반까지 한반도에 군사력을 집중한 결과 서역과 북방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토번의 성장, 돌궐의 재등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역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당의 주력이 서역으로 향하자 신라와 고구려유민들은 대당전쟁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76년 나당전쟁의 종식에도 676년 이후 급박해지는 토번과의 전쟁, 토번의 동맹세력인 서돌궐의 재흥 등이 중요한 국제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북방과 서역의 동요는 계속되었으며, 이는 다시 동북방에 영향을 주었다. 696년 동북방에서 거란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말갈과 고구려유민이 독립하여 698년에 발해가 건국된 것도 그러한 동향과 연관된다.

고구려 멸망이 가져온 정세변화

7세기 들어 나타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크게 2가지 축을 중심으로 변동하고 있었다. 하나는 중국의 통일국가인 수·당과 고구려 사이에 이루어지는 동북아시아 세력권 장악을 둘러싼 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 내 삼국 간 전쟁이다. 고구려가 양쪽의 공통된 당사자라는 점과 나아가 수와 당이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점차 하나의 축으로 통합되어 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 결과 680년 한반도에서 세력재편이 끝났을 때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당을 중심으로 서역에서는 토번이 세력을 확대하고 북방에서는 동돌궐이 재흥하여 반당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달리 동북아시아에서 신라는 당과 재통교 이후 시종 우호적이고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일본 역시 당의 율령체제를 수용하면서 친당적인 입장이었다. 발해는 한때 군사적 충돌까지 갔으나, 기본적으로는 화평관계를 유지하며 당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동북아의 여러 왕조는 친당의 태도를 견지하였는데, 이는 수·당에 대하여 시종 적대세력으로 남았던 고구려의 멸망이 가져온 결과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