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한지 아직 1년도 안되었으므로 지금은 재단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조직의 정체성은 법이나 정관으로 확립되는 것은 아니며, 그 조직 구성원의 끊임없는 토론과 활동을 통해 정립된다. 이러한 과정에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폭넓게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재단이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발전해가면 좋을지 비견을 피력보고자 한다.
한 조직의 정체성은 지향 및 관점과 관련이 깊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과 영토문제, 동해 표기 등의 역사 관련 현안을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재단이 이들 역사왜곡과 영토문제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우리 역사와 영토를 지키고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상대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동북아의 역사재단'이 되면 어떨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아의 역사 및 그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고 정책을 수립하며, 때로는 실천까지도 하라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국의 관점에서, 한국을 중심으로”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물론 중국이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었고, 고구려와 발해, 고조선 등을 모두 중국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일본이 한반도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종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마당에, “한국의 관점에서, 한국을 중심으로” 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동북아의 역사 관련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북아의 역사재단'은 한국이 설립하고 한국에 있는 재단이지만, '한국의' 역사재단에 머물지 말고 '동북아시아의' 역사재단을 지향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붙여본 이름이다. 굳이 얘기하자면, 대상으로서의 동북아가 아니라 또 하나의 주체로서 동북아를 상정한 것이다.
그것은 동북아의 관점에서 동북아 공통의 역사 관련 문제를 연구하고 대책을 세우며, 그 연구 결과와 대책이 동북아에서 객관성을 인정받고 실효성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통일과 평화의 민족주의
이러면 주체를 포기하거나 변경하자는 것이 아니냐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역사학은 진실을 탐구하는 과학이지만, 인간이 살아온 자취를 탐구하기 때문에 연구하는 사람 즉 주체가 있고 그의 주관이 개재될 수밖에 없다. 동북아 삼국은 일찍부터 민족을 형성하고 단일국가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민족과 국가 중심으로 역사를 사고한다. 국가와 민족이 역사의 단위이자 연구의 단위이며, 그 실제 내용이 어떠하든 민족주의는 자연스러운 정서로 작용하고 있다.
민족 중심의 사고는 다른 민족과 충돌하는 것이 일반적 속성이다. 더욱이 침략과 지배, 저항의 근대사를 경험한 세 나라의 민족주의는 그 연원과 지향이 달랐고, 지금도 지향하는 바와 역할이 다르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한족과 소수민족을 '중화민족'으로 묶어 통일적다민족국가를 완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고, 일본의 그것은 2차대전 패전 결과로 이입된 가치관을 수정하며 우익 성향이 강한 이념과 체제 만들기를 지향하고 있다.
재단의 정체성은 결국 한국 민족주의는 무엇을 지향하고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쉽지 않은 질문과 관련이 있다. 대략적으로 말한다면, 동북아 국가들이 평화롭게 공영하는 '평화민족주의'와 통일을 목표로 하는 '통일민족주의'를 지향하고, 통일과 평화를 위한 동력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지향은 한국민족주의의 진취성과 건강성을 보여주며, 적어도 그런 점에서 보편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평화민족주의'는 동북아를 평화 공동체로 묶어나가는 것을 당면의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동북아에는 햇볕과 구름이 교차하고 있다. 한·중·일 3국은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갈등에도 불구하고 역내 교역은 증가하고, 정부간 협력이나 시민사회의 연대도 강화되며, 문화교류도 더욱 활발해져 국가 사이의 장벽은 낮아지고 있다. 그런 한편 일본은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보유하며 보통국가로 거듭날 채비를 갖추고 있고,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지만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는 아직도 냉전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이러한 역동적 변화의 현장, 동북아를 평화 공동체로 묶어나가기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주체를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동북아의 관점을 함께 갖는 것이 필요하다.
수준 높은 연구로 권위 획득해야
'통일민족주의'는 한반도에 상존하는 갈등 요소를 제거하고 단계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며, 궁극적으로 남북통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재단은 중·일 양국과 관련된 역사와 영토 문제를 주로 다루지만, 역사와 영토문제는 북한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보았듯이 중·일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공조가 필요하며, 동북아의 평화 정착과 지역 안정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통일이 불가결한 요소이다. 북한이라는 요소와 변수를 늘 고려하면서 연구하고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단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또 하나의 길은 권위 획득과 관련이 있다. 재단은 동북아의 역사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 최고의 권위를 연구와 정책 부문에서 확보해야 한다.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참신성과 충분하고 합리적인 사료 검토와 해석을 바탕으로 객관성을 확보한 수준 높은 연구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 따라서 연구 수준을 높이는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실제로 일을 하다보면 현안에 매몰되기 쉽다. 그렇지만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과 영토문제에 대한 대증적 방책 마련에 급급하지 말고, 遠謀深慮의 자세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21세기가 끝나갈 때쯤을 염두에 두고, 때로는 한국이라는 틀을 과감히 넘어서서, 한국과 동북아의 '변증법적 결합'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과 활동이 축적되면 재단의 정체성은 저절로, 그리고 바람직하게 확립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