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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리포트
미국 워싱턴 D.C.에서 찾은 작은 비석, 그 속에 깃든 한미외교사
  •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 소장

미국 워싱턴 D.C.에서 찾은 작은 비석, 그 속에 깃든 한미외교사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전경

 

조선인 대리공사 이채연의 어린 아들이 사망했다. 그 아이는 지난해 10월 워싱턴시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을 따서 워싱턴의 조선어 번역인 이화손(Ye Washon)’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묘비에 이름을 새겼다).”

 

18901224일 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헤럴드(Los Angeles Herald)는 이 같은 단신기사를 게재했다. 미 대륙의 동쪽 반대편(현 워싱턴 D.C.)에서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의 죽음

을 다룬 부고기사다. 하지만 이 짧은 기사는 133년의 세월을 넘어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 워싱턴 D.C.의 오크힐 묘지(Oak Hill Cemetery)1849년 조성되었다. 이곳은 미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들이 잠든 공원묘지다. 특히, 이름난 외교가들의 안식처로도 유명하다. 세스 L. 펠프스(Seth L. Phelps, 1824~1885)의 가족묘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남북전쟁 당시 해군장교로 복무했던 펠프스는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랜트 장군의 휘하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또 은퇴 후 정치인, 외교관으로도 승승장구했다.

  1885년 그가 죽자 이곳에 묘지를 조성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펠프스 가족묘의 시작이다. 한편 펠프스가 죽자 그가 살던 집을 사위에게 물려주는데, 훗날 국무부 차관에 오르는 펠프스의 사위 세블론 브라운(Sevellon A. Brown, 1843~1895)은 이 집의 소유권을 25천 달러에 고종(高宗, 1852~1919)에게 넘긴다. 바로 현재 워싱턴 D.C.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하

공사관’)’ 건물이다.


이채연 (출처: Munseys Magazine, 1892)

이채연

(출처: Munseys Magazine, 1892)

 

이채연 부인 성주 배씨 (출처: Munseys Magazine, 1892)

이채연 부인 성주 배씨

(출처: Munseys Magazine, 1892)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조선인

공사관은 1889년부터 1905년 을사늑약 시점까지 16년간 워싱턴 D.C. 중심부에서 외교의 중심 무대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일제는 공사관 건물을 헐값에 매각처분했다. 문화재청은 이 공사관 건물을 지난 201210350만 불에 사들여 복원했다. 이어 조선왕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대미외교 활동상을 소개한 전시관으로 꾸며 20185월 개관했다.

  그런데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공사관 복원을 앞두고 미국의 옛 신문자료를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9010월 공사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나, 생후 2개월 만에 숨져 인근 오크힐 묘지에 묻혔다는 것이다. 숨진 아이의 아빠는 이채연(1861~1900) 대리공사, 엄마는 성주 배 씨였다. 그러나 이어 오크힐 묘지 기록보관실에서 추가로 찾은 매장기록물과 죽은 아이의 작은 묘지(묘비명 이화손’)를 샅샅이 살펴본 결과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아이의 묘지는 앞서 공사관 건물주였던 펠프스의 가족묘에 함께 조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신원보증인이 펠프스의 사위이자 당시 국무부 차관이었던 브라운이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장묘제도만큼 보수적인 제도가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색도 다른 이방인의 주검이 타국 땅 외교명문가의 가족묘에 선뜻 받아들여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묘비였다. 불과 30센티 남짓한 묘비 전면에는 영어명 ‘Ye Washon(이화손)’이 또렷했다. 묘비 후면에는 조선 니화손이란 궁서체 한글이 드러났다. 이는 국적은 조선’,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의 음차)에서 태어난 자손(子孫)’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짙은 슬픔이 느껴진다.

 

이화손(Ye Washon) 묘비 뒷면 ‘조선 니화손’

이화손(Ye Washon) 묘비 뒷면 ‘조선 니화손’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우선 비석 위 곱게 써내려간 한글은 엄마의 글씨로 추정된다. 갓 태어난 아이를 잃고 붓을 들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무엇보다 아이의 이름 석 자를 유심히 살펴보면 더욱 슬퍼진다. ‘아이의 이름이란 장차 아이의 미래를 축원하는 뜻을 삼아 짓는 법인데, 아이의 주검 위에 세워질 비석에 새겨 넣고자 이름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익 앞에 한없이 냉정한 게 외교다. 그런 외교사전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워싱턴 D.C.의 한 외교명문가 가족묘에서 발견된 조선 니화손묘지는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1890년 당시 조선과 미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최근 이화손 묘지는 워싱턴 D.C.의 역사보존을 위해 각계 역사보존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간기구(DC Preservation League)에 의해 워싱턴 D.C.의 역사적인 장소(DC Historic Sites)’로 선정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오랜 역사적 관계에서 이화손 묘지는 주목할 장소라는 것이다. 또한 오크힐 묘지 관리소 측에 따르면 이화손 묘지를 찾고자 문의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작은 묘비 속에 깃든 커다란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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