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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현장 방문, 쓰시마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다
  • 최덕규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 연구위원

러일전쟁 현장 방문, 쓰시마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다

러시아군과 일본군을 위한 일본 후쿠오카 무나카타 오시마섬의 쓰시마해전 기념비

 

러일전쟁(1904~1905)의 쓰시마해전이 벌어진 1905527일의 아침은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9년 전인 1896년 이날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Николай)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 대관식에는 제물포를 출발해 태평양과 대서양을 거쳐 노도(露都)에 도착했던 고종의 특사 민영환 일행도 참석하였다.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З.П.Рожественский) 제독은 아침 8시 황제의 대관식을 기념하며 깃발을 높이 올려 임전 태세를 갖췄다. 그는 러시아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일본함대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쓰시마해전의 승패가 대한제국과 제정러시아의 운명과 연동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민영환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유는 명확했다.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명성황후의 시해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강대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관식을 치른 9년 뒤 러시아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부여된 사명 역시 명료했다. 그것은 혁명의 위기에 몰려 있는 차르정부를 구원하기 위한 승전보였다. 국민의 관심을 내부에서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승전 소식이 간절했다. 따라서 결전의 장소인 대한해협이 20세기 세계를 혁명의 연쇄로 몰아갈 진원지가 될 것인지의 여부는 쓰시마 해전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가덕도 외양포의 포진지 유적 답사 외양포 포진지에 대한 설명은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신 윤용출 교수님께 서 맡아주셨다.

가덕도 외양포의 포진지 유적 답사 외양포 포진지에 대한 설명은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신 윤용출 교수님께서 맡아주셨다.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는 2024년 러일전쟁 12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1월 쓰시마섬 현지 답사를 실시했다. 답사의 배경에는 뉴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의 전쟁을 주제로 3부작 세계사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23(11.6.~8.)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부산 가덕도 외양포 소재 러일전쟁 유적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튿날 페리호를 타고 쓰시마 히타카(比田勝)로 이동하여 일본이 기억하는 러일전쟁 유적을 들여다보았다. 도노자키(殿崎) 전망공원, 도요포대(豊砲臺), 만제키바시(萬關橋) 등을 둘러볼 수 있었으나 12일의 쓰시마 일정은 섬 자체도 돌아볼 수 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추후 제대로 조사하리라 다짐한 채 아쉬움을 안고 돌아왔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가덕도 외양포에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하여 4개월 만에 포진지와 막사를 완공되었으며, 일제 패망 시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외 양포에는 옛막사, 포진지, 우물,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가덕도 외양포에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하여 4개월 만에 포진지와 막사를 완공되었으며, 

일제 패망시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외양포에는 옛막사, 포진지, 우물,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다.

 

러시아 제2태평양함대의 극동내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제2태평양함대는 19041015일 발트(Balt)해를 출발하여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통과하여 대한해협에 내도하였다. 유럽에서 극동에 이르는 18,000마일의 항로는 두 갈래 선택의 길이 있었다. 배의 물에 잠기는 부분인 흘수가 깊은 최신예 대형전함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를 택했고, 연식이 오래된 전함들은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로 하였다. 이후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서 재결합한 함대는 인도양을 거쳐 극동으로 항진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19048월 차르의 재가를 받았다.


러시아해군 상륙지를 알리는 표지판 쓰시마해전에서 패배한 러시아수병들은 쓰시마로 표류해 와 언덕을 올라왔다고 한다. 현지 일본인들이 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러시아해군 상륙지를 알리는 표지판 쓰시마해전에서 패배한 러시아수병들은 쓰시마로 표류해 와 언덕을 올라왔다고 한다. 

현지 일본인들이 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 편성은 일본해군에 의해 뤼순(旅順)항에 봉쇄되어 있던 태평양함대의 구원이 최우선의 목적이었다. 러시아는 지리적 특성상 발트해, 흑해, 태평양에 개별 함대를 보유해야 했다. 러시아는 함대의 규모면에서 영국 다음으로 프랑스와 2위 다툼을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3개 함대를 분산 배치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전략적 약세를 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단점을 보완하는 방책이 바로 군함의 순환배치였다. 특히, 시베리아철도의 착공(1891) 이후 청일전쟁 (1894 ~ 1895)에서 일본해군의 우수한 전투력이 목격됨에 따라 태평양함대의 증강 필요성은 고조되어 갔다. 새로 건조되는 신예 전함들을 극동해역에 우선 배치하기로 결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결과 증가된 전함들을 수용할 항구를 찾고 이를 획득해야 할 과제가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부상하였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위문하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쓰시마해전 전적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러일우호탑이 있다. 러일우호탑에는 쓰시마 해전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로제스트벤스키를 위문하는 도고 헤이하치로 일 본사령관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위문하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쓰시마해전 전적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러일우호탑이 있다. 

러일우호탑에는 쓰시마해전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로제스트벤스키를 위문하는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사령관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동양 최고의 항구로 평가받았던 한반도 남부해안의 마산포, 진해 등은 러시아 해군이 가장 탐내던 해군기지였다. 1898년 청으로부터 조차했던 랴오둥 반도의 뤼순항과 다롄항(大連港)은 차선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뤼순항은 러시아해군이 중시하던 대한해협의 자유항행권을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2태평양함대가 뤼순항의 태평양함대를 구원할 경우, 마산포를 점령하여 통합태평양함대의 기지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해상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만주의 일본육군을 고립시킨다는 작전계획이 수립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쓰시마해전 승전기념비 승전기념비에는 당시 사망한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대부분 러시아군인이다. 기 념탑 꼭대기에는 일본과 러시아 국기가 걸려 있다.

쓰시마해전 승전기념비

승전기념비에는 당시 사망한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대부분 러시아군인이다. 기념탑 꼭대기에는 일본과 러시아 국기가 걸려 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 대한 판단: 무능 혹은 충성심

  러시아 해군 수뇌부의 장밋빛 전망과 대조적으로 육군성은 제2태평양함대 파견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쟁점은 제2태평양함대가 극동에 내도할 때까지 과연 뤼순항과 태평양함대가 건재할 것인지의 여부였다. 육군상은 일본군에 대한 대반격은 이듬해(1905) 봄에 가능하나 이 경우, 뤼순항은 이미 함락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았다. 이는 로제스트벤스키 함대 파견의 명분 자체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일본해군이 포위하고 있는 뤼순항을 일본육군이 압록강을 건너 후면에서 공략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은 파견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육군의 대반격 상황에 맞춰 파견을 늦춰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해군참모총장이었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제독의 고뇌는 그렇게 깊어갔다.

  로제스트벤스키의 해법은 파견 계획의 철회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한 결단이었다. 그는 니콜라이 2세가 함대의 파견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함대 파견의 득실을 합리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혁명의 위기에 몰린 차르체제의 구원이 우선이었다. 황제의 권위와 차르체제의 신성함을 빛내줄 체제 수호 이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독이 출정을 결단한 것은 체제 수호의 영웅심과 더불어 체제 유지의 순교자가 되려했던 변형된 충성심일 수 있다.


만제키세토(萬關瀨戶) 운하 만제키바시는 쓰시마섬의 서부의 아소만과 동부의 미우라만을 잇는 운하다. 쓰시마해 전에 대비하여 함대를 통과시키기 위해 운하를 개통했다고 한다.

만제키세토(萬關瀨戶) 운하

만제키바시는 쓰시마섬의 서부의 아소만과 동부의 미우라만을 잇는 운하다. 

전에 대비하여 함대를 통과시키기 위해 운하를 개통했다고 한다.


  로제스트벤스키의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제2태평양함대의 극동원정 이전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해군은 로제스트벤스키 함대의 극동원정(1904~1905) 이전에 레솝스키(С.С.Лесовский) 함대의 동아시아 원정(1880~1881) 경험이 있었다. 레솝스키 제독은 신장(新疆)지역의 이리(伊犁)문제로 청국과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해군대신을 사임하고 26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서 극동원정을 성사시켰던 인물이었다. 1880년 블라디보스토크가 태평양함대 기지로 개발되었던 계기도 레솝스키 함대의 극동원정이었다. 러시아 함대의 극동원정으로 야기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이 황쭌센(黃遵憲)으로부터 입수한 조선의 안전보장책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이었다. 요컨대 조선책략은 청국의 공러(恐露)의식의 전형이었다.

  레솝스키 함대의 위력은 직접적인 대청(對淸)해전에서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국 해안에서 실시된 함대의 해상시위가 청국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중시켰다. 리훙장(李鴻章)이 조미수교를 위해 일본에 머물던 미국의 슈펠트(R.W.Shufeldt) 제독을 톈진(天津)으로 초대했던 이유도 러청 해전의 전망에 대한 제독의 자문을 청취하기 위함이었다. 제독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결과는 청국에 재앙(disaster)이 될 것이라는 것. 그 결과 레솝스키 함대는 청국과 전쟁을 치르지 않은 채 러시아에게 유리한 러청통상조약(1881)을 체결할 수 있었다. 레솝스키 제독은 청 정부의 조약 비준이 이루어질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다 일본에 들러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따라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역시 레솝스키함대의 극동원정 경험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이 크다.


쓰시마해전이 벌어졌던 아소(淺茅)만 아소만은 크고 작은 섬들이 밀집해 있어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일본해군은 섬 사이에 숨어 러시아해군을 공격했다.

쓰시마해전이 벌어졌던 아소(淺茅)만

아소만은 크고 작은 섬들이 밀집해 있어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일본해군은 섬 사이에 숨어 러시아해군을 공격했다.

 

 

일본 사세보에서 보낸 로제스트벤스키의 보고서

  재단에서 2022년 러시아해군성문서관(RGAVMF)에서 발굴한 로제스트벤스키의 보고서는 쓰시마해전이 러시아에게 비극으로 끝난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19057월 포로의 신분으로 일본 사세보(佐世保)에서 러시아해군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차르정부의 외교적 실패에 대한 울분이 짙게 배어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는 19052월 발트해를 출발한 네보가토프(Н.И.Небогатов) 전대를 기다리기 위해 1905414일부터 59일까지 사실상 인도차이나 해상에 떠 있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국임에도 전시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자국령 인도차이나 항구에 교전국 군함의 기항을 거부하였다. 일본으로부터 외교관계 단절 위협을 받은 프랑스에게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러시아의 크론슈타트로부터 16,600마일을 달려온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는 급수와 신선한 보급품이 필요했음에도 결국 항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더욱이 영국은 청국의 중립을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러시아 함대의 상하이 입항을 가로막았다. 상하이 소재 러시아의 석탄창고에서조차 석탄과 식수를 보급받지 못한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는 자국 수송선들이 날라 온 석탄을 동중국해 해상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러시아함대는 지쳐가고 있었다.

  동중국해 해상에서도 제독은 발트해로 되돌아오라는 차르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하더라도 일본해군에 의해 항구는 포위당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르의 회귀 명령은 없었다. 이제 로제스트벤스키는 차르체제 유지를 위한 제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함대를 대한해협의 바다 밑으로 천천히 이끌어 갔다.

  차르의 대관식 9주년 기념일에 벌어진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해군 5,045명이 사망했고 7,282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차르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민영환은 쓰시마해전 이후 일본이 강제한 을사늑약 체결에 저항하기 위해 자결(1905.11.30.)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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