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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리포트
우리 근현대사를 지켜본 단풍나무섬 풍도(楓島)
  • 박장배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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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로 무산된 풍도 답사


  재단 한중관계사연구소는 46일 아침,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풍도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오후 1시까지 대기하다가, 결국 출항이 취소되어 풍도행을 취소해야 했다. 1894725일 풍도해전 당시에도 풍도 서남쪽 바다는 아침 안개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 연구소가 풍도에 가려고 한 것은 역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한 것이었다. 아산만 바깥바다에 있는 풍도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 속하는데 면적은 1.51제곱미터이며,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2012년 이후 이 섬은 야생화의 천국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무엇보다도 풍도는 해상 교통로에 위치하기 때문에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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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 마을에서 본 풍도 포구


홀로 떠난 풍도 여행


  풍도 방문이 무산되어 허전하던 토요일 아침, 평소 야생화를 좋아하던 이들이 올린 사진을 보고 지금 보지 않으면 평생 풍도를 보지 못할 것 같아 길을 나섰다.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에서 1시간 15분 만에 도착해서 만난 풍도 사람들은 방문객에게 비교적 친절한 편이었다. 선착장 인근에는 풍도 야생화를 보호해 주세요라는 현수막과 풍도바람꽃, 풍도대극과 같이 대표적인 야생화 사진도 붙어 있었다. 대형 풍도 마을지도에는 북배와 청나라 군사 잠든 곳이라는 표시도 보였다. 운좋게 내가 묵기로 한 민박집 주인인 한계동(韓桂東, 1942년생)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청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50914의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봤다고 하셨다.

  옛날부터 동해는 독도, 서해는 풍도라고 했어요. 풍도가 왜 유명하냐 하면 양쪽으로 다 항로거든요. 청나라하고 일본이 싸운 건 들은 것이고 인천상륙작전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직접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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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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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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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


풍도해전에서 시작된 청일전쟁


  이야기가 흥미로워 더 얘기를 청해 들었다. “섬의 서남쪽 해변에는 북배라고 붉은 바위가 있어요. 풍도해전은 1894725일 아침 바로 북배 바깥의 바다 위에서 일어났지요. 당시 풍도 쪽으로 청나라 군사 시신이 100여 구 떠내려와 북배 위 산등성이에 묻었다고 합니다.”

  청일전쟁의 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풍도해전은 당일 아침 일본 해군이 아산만 바깥 바다의 풍도 서남해역에서 속사포로 청나라 함선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청나라는 18941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북양해군 순양선 제원(濟遠), 통보함 조강(操江), 수송선 고승(高陞) 등을 파견했다. 725일 아침 양국 함정들이 풍도 앞바다에서 마주한 지 약 6시간 만에 청나라 전함 한 척이 파괴되었고 다른 한 척은 못쓰게 되었으며 통보함 한 척이 나포되고 수송선 한 척이 침몰했다. 특히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함장이 지휘하는 나니와호(難波號)의 어뢰 공격을 받은 고승호는 1,000여 명의 정예병사와 함께 침몰했다.

  당시 청나라는 종주권강화 정책을, 일본은 팽창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시기에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1891.5)은 영국을 긴장시켰다. 영국 정부는 () 영일 통상항해 조약에 서명(1894.7.16.)하며 사실상 일본의 청나라에 대한 개전을 묵인했다. 일본군은 723일 조선 왕궁을 무단으로 점령하였다. 다음날에는 청나라와 연결된 전신선을 절단하고 마침내 25일 아침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에 함포를 발사했다. 청일전쟁은 양국 군대가 서구식 무기와 군함 그리고 영국이 독점했던 전신네트워크를 활용해 서구의 전쟁규칙을 의식하며 수행했던 글로벌 전쟁이었다.

  사실 풍도는 19459842척의 미군 함정들이 인천에 상륙할 때도, 1950915일 인천상륙작전 때도 그 장면을 목격했다. 풍도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의 인천상륙작전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초저녁부터 생전 보지도 못한 큰 배들이 영흥도 앞으로 쭉 서는 거예요. 새벽 서너 시 되니까 함정들이 포를 쏘기 시작하는데 불이 인천으로 쫙 날아가는 거예요.”

  한국전쟁 때 풍도에는 공산군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그 태극기를 보고 반가워했다고 한다. 한계동 할아버지는 당시 부산일보‘OO라고 되어 있는 게 사실은 풍도이며 풍도가 적시된 기록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출발점은 풍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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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 전투가 벌어진 바다와 붉은 바위 북배


고로쇠나무 새잎이 피는 풍도가 자아내는 이중의 감회


  아산만 바깥 바다의 작고 아름다운 섬 풍도는 풍도해전, 인천상륙작전의 이야기를 품고 우리에게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촉구하는 듯하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큰 울림과 교훈을 준다. 1894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속에서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의 바다와 땅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심지어 전쟁터로 삼았다. 당시 조선은 근대 해군과 대양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해전에는 구경꾼이었다.

  내년 청일전쟁 130주년을 앞두고 풍도의 해변 산책로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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