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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와 독립운동의 전개
  • 김현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와 독립운동의 전개

1941년에 발행된 부활절 봉기 기념 우표

아일랜드 봉기군이 점거하여 총사령부로 삼은 중앙우체국의 모습이 담겨있다.

ⓒBrian Maudsley / Shutterstock.com

 


수백 년 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는 1900년대 초까지 일종의 자치를 추구해왔으나, 영국 내 입장은 의견이 엇갈리며 대립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1886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012월 총선거 결과 자유당 272, 보수당 172석에 이어서 아일랜드민족당(Irish Nationalist Party)84석을 획득하면서, 자치를 지지하는 아일랜드인들을 고무시켰다. 마침내 영국의 자유당 정부가 19124월에 제출한 3차 자치법안이 19131월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Ulster)에 살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신교도들이 이러한 아일랜드 자치법안에 반대하였다. 그 후 아일랜드통일당 의장 카슨(E. Carson)을 중심으로 얼스터 분리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얼스터 의용군까지 결성되었다.

 

영국군의 봉기 진압 후 파괴된 중앙우체국 건물의 모습 출처: National Library of Ireland on The Commons

영국군의 봉기 진압 후 파괴된 중앙우체국 건물의 모습

출처: National Library of Ireland on The Commons

 

 

부활절 봉기의 배경과 원인: 아일랜드 자치에 대한 영국 내 입장 변화와 징병제의 도입

영국의 자유당 정부는 얼스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결정하고, 아일랜드 내 군사 요충지인 커러Curragh에 주둔 중인 영국군에게 얼스터 의용군의 진압을 위한 부대 이동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커러 주둔 영국군 일부 장교들은 명령에 집단으로 반발하며 이를 거부했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자치 문제를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었다. 커러 지역 영국군의 반란은 곧 무마되었으나, 이 사건은 평화로운 방식으로는 영국 지배자들에게 자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아일랜드에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얼스터 의용군에 맞서기 위해 남부 아일랜드인들도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1311월 의용군 모집이 시작된 첫날 약 4천 명의 지원자가 쇄도하였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약 2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의용군은 커러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크게 두 단체로 나뉘었다. 하나는 다수파를 차지하는 민족의용군National Volunteers으로,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자치를 확보하려는 아일랜드민족당 지지자들이었다. 이와 대립된 입장에 선 다른 단체는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삼은 아일랜드의용군Irish Volunteers이었다. 아일랜드의용군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약 13,500명 정도였으며, 그중 2천 명 정도가 더블린 여단 소속이었다. 패트릭 피어스Patrick H. Pearse, 플런켓Joseph Plunkett, 맥도나우Thomas MacDonagh 등은 자치 운동에 머문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을 비판하며 부활절 봉기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이른바 혁명 세대의 대표 주자로서 문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높았으며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보였다.


당시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식민 정책 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아일랜드인에 대한 징병 정책이 1916년 더블린에서 일어난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의 직접적 배경이자 주된 원인이었다. 19148월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아일랜드 자치에 관한 모든 논의를 중단시켰고, 자치법안 실행도 잠정 연기시켰다. 그러자 자치를 지지한 정파들의 정치적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때 지배 국가인 영국의 이익을 위해 아일랜드 청년들에게 피 흘릴 것을 강요하는 징병법이 공포되었다. 이에 아일랜드 민족운동 세력들은 정파를 떠나 일치단결하여 거세게 반발하였다.


부활절 봉기 주도자가 처형된 킬마이넘 감옥 전시관 내의 장소 ⓒDerick Hudson / Shutterstock.com

부활절 봉기 주도자가 처형된 킬마이넘 감옥 전시관 내의 장소

ⓒDerick Hudson / Shutterstock.com

 

 

1916년 부활절 봉기와 아일랜드의 독립 선언

아일랜드의용군을 지휘한 피어스 등의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부터 무장독립투쟁을 구상하였다. 피어스는 1914년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소총 1천 정을 밀반입하여 의용군에 배포하고 사기를 높였다. 부활절 봉기 당시 37세였던 피어스는 봉기군의 총사령관으로 마지막까지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아일랜드인은 1916년 부활절 주간 다음 월요일인 424일 더블린 시내 중앙우체국General Post Office 앞에 모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아일랜드 임시공화국의 대변인이기도 했던 피어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아일랜드 독립선언문the Proclamation of Republic을 낭독하면서 피의 희생을 통한 민족적 부활을 주창하였다.


아일랜드인이여, 그대들에게 고대 국가를 물려준 하나님과 선조의 이름으로 자유를 위한 깃발과 투쟁 앞으로 그대들을 부른다. 아일랜드인의 모든 세대는 자유와 권리를 요구해 왔다. 지난 3백 년 동안 여섯 번을 무력으로 호소하였다. 다시 한번 무력으로, 기본권에 입각하여 세계에 호소하며 이에 우리는 아일랜드 공화국이 주권 독립 국가임을 선언한다. 자유의 대의에 우리의 생명과 동지들의 생명을 걸고 무기 앞에 맹세한다.”


부활절 봉기 장소인 중앙우체국 자리에 세워진 역사기념관 전경

부활절 봉기 장소인 중앙우체국 자리에 세워진 역사기념관 전경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피어스 등 7명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공화국the Republic이 모든 시민에게 종교와 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함을 선언하였다. 독립선언문에서는 아일랜드 전체 민족nation과 모든 구성원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 결의를 선포하였고, (아일랜드) 민족 내 모든 어린이들을 평등하게 소중히 여길 것을 선언하였다.


부활절 봉기의 주요 지도자인 맥도나우는 교사이자 시인으로, 아일랜드의용군 훈련대장이었다. 그는 더블린 여단 소속 부대를 이끌었고, 봉기 이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피어스와 함께 53일에 총살당하였다. 그리고 플런켓은 시인이자 작가이며 편집인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의용군 창설자 중 한 명으로, 부활절 봉기와 무기 지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1915년에 미국과 독일을 방문하였다. 플런켓은 봉기 이후 체포되어 킬마이넘 감옥Kilmainham Gaol에 수감 중 53일에 그레이스 기포드Grace Gifford와 옥중 결혼하였으나, 그다음 날 처형되었다.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활절 봉기 관련 사진들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활절 봉기 관련 사진들

 

 

영국군의 진압과 아일랜드의 민족적 저항

부활절 봉기 당시 아일랜드인 2천여 명은 중앙우체국을 총사령부로 삼았다. 아일랜드의용군 및 노조원 1,200여 명이 더블린 시내의 주요 시설과 행정기관을 기습 점령하자, 수세에 몰린 영국군은 본토의 증원을 받아 16천여 명의 병력으로 6일간 아일랜드인들을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일랜드 민간인과 봉기군 500여 명이 사망하고, 2,5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영국군도 132명이 사망하고 397명이 부상하는 등 커다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처음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을 때 아일랜드인 대부분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아일랜드인은 싸우려 하지 않았고, 영국에 맞설 의지도 없었다. 그러나 영국이 잔인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론이 반전되었다. 게다가 191652일부터 1주간 개최된 군사 법정에서 봉기를 주도한 지도부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킬마이넘 감옥에서 형을 즉시 집행하자 아일랜드 민중은 크게 분개하였다.


19176, 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이해 당사자 간 조정 회의Convention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영국 정부, 얼스터통일당, 아일랜드민족당, 가톨릭 주교단 등 각 정당 및 단체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아일랜드의 자치 문제를 논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었지만, 핵심 문제인 징병에 대해서는 참석자 간에 커다란 이견이 있었다. 얼스터 지방 대표들은 전쟁 참여와 징병제는 아일랜드인의 의무로, 이를 자치 문제와 연계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일랜드민족당은 즉각적 자치의 실시는 바람직하지만, 징병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영국 정부도 조정 회의 성립은 실질적으로 아일랜드 자치를 인정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동일한 권리를 부여받은 아일랜드인은 잉글랜드인과 동일하게 징병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후 1918321일 서부 전선에서 시작된 독일의 대공세로 수세에 몰린 영국은 아일랜드 징병을 강제하는 법률을 상정하고 416일에 통과시켰다. 이에 아일랜드는 일치단결하여 징병제에 항거하였다. 418일 아일랜드 가톨릭주교회의는 강제 징병은 아일랜드 성직자와 국민에 대한 모욕이며,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후 아일랜드 전국에서 징병 반대를 위한 집회와 결의가 이어졌다. 그리고 421일 미사에서 징병에 저항할 것을 엄숙히 서약하는 국민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날 아일랜드노동조합회의가 개최한 전 아일랜드 회의에서는 ‘423일부터 파업에 돌입할 것, 거리 시위와 서명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이후 아일랜드 경찰이 징병제 반대 대열에 합류하였으며, 아일랜드민족당 의원들도 항의 표시로 런던을 떠나 아일랜드로 철수하였다.

이와 같은 아일랜드의 민족적 저항과 제1차 세계대전의 갑작스러운 종결로 징병법은 실시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에서는 대화와 협력보다는 투쟁이 강조되었고, 자치가 아닌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부활절 봉기는 군사적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받았다.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활절 봉기 관련 사진들

군중을 향해 연설 중인 에이먼 데 벌레라(사진에서 가운데)

출처: National Library of Ireland on The Commons

 

 

아일랜드공화국의 탄생과 아일랜드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부활절 봉기 이후 신 페인이 아일랜드민족당의 뒤를 이어 아일랜드 민족운동의 정치적 대변자로 부상하였다. 원래 신 페인은 1905년 언론인 그리피스Arthur Griffith가 창설하여 민족당 노선에 반대하고 독립을 주장해 온 소규모 단체로,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지휘관인 데 벌레라가 신 페인의 의장이 되면서 독립공화국과 징병 반대라는 부활절 봉기의 이상을 계승하였다. 이들은 조정 회의에 초청되었으나 영국과 어떠한 회의도 거부하면서 아일랜드의 무조건적 독립을 주장하였다.


신 페인은 19181026일 독립을 명문화한 아일랜드공화국헌장을 발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아일랜드에서 영국을 축출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같은 해 12월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73석을 차지하면서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총선 직후에는 영국 의회에 합류하지 않고 아일랜드 의회를 독자적으로 구성하였으며, 얼스터 지방을 제외한 32개 주의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19194월 두 번째 회기에서는 데 벌레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내각 구성도 완료하였다.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의 주도로 재건된 아일랜드의용군은 정부 수립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군Ireland Republican Army(IRA)이 되었다.


부활절 봉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는 아일랜드 무장독립투쟁의 본격적인 시작과 같았다. 1919121일에는 아일랜드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의 첫 총성을 울렸다. 19193월 영국은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했지만 아일랜드는 완전한 독립공화국을 추구하였다. 그 후로도 아일랜드공화국군IRA2년이나 항쟁을 이어가자, 영국은 1921년 아일랜드에 자치령을 부여하고 협상을 제안하였다. 19221, 아일랜드 의회가 7표 차로 조약을 비준하여 아일랜드자유국Irish Free State이 성립되면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오랜 지배와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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