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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선사 미술 속의 에로티시즘
  • 장석호, 재단 북방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선사 미술 속의 에로티시즘

난교 (키르기스스탄, 사이말르이 타쉬)


현장 조사는 언제나 고달프지만 짜릿함을 안기는 귀한 자료들을 발견하게 되면 커다란 황홀감에 젖는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심신의 피로가 사라지기도 한다. 선사 및 고대 바위그림을 공부하는 필자는 그 짜릿함의 원천을 찾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삼십 수년 동안 세계 각지의 산간 계곡을 뒤지며 풍찬노숙을 하고, 이 분야에서 이미 이름이 자자한 유적은 물론, 한 번도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다녔다.


바위그림 유적지의 공간 조건과 그 속에 그려진 형상들, 그리고 그것을 남긴 사람과 현지 거주민의 사유 세계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하나의 거대한 다기능 문화 복합체(complex). 바로 그것이 필자가 발견하고 싶었던 원천이었다. 이를 통해 인류가 지녔고, 또 현재도 지니고 있는 본능혹은 원형 심리의 보편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했다. 시간적 단위에서 살펴보면, 바위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3만 수천 년간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 공간적으로도 에버리지니(Aborigine, 원주민)의 나라 오세아니아 대륙이나 여전히 수렵과 유목 생활을 하는 시베리아와 몽골, 인류의 시원인 아프리카 대륙뿐만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라 하는 유럽과 미주 지역, 그리고 우리 한반도에까지 지구의 전 지역에서 똑같이 관찰된다.


그러니 바위그림은 분명히 문명사의 여명기부터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범지구적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일까? 비록 지역은 다를지라도 바위그림 제작이 지구 어디서나 관찰되는 보편적 문화라면 그 밑바닥에는 마땅히 인간의 본능 혹은 원형 심리가 관통할 것이라는 필자의 막연한 믿음이 작용했다. 그래서 그들이 주로 무엇을 그렸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 변함없이 그림을 그렸는지, 어떤 공간을 그림터로 삼았는지, 바위 위의 형상들은 어떤 조형성을 띠고 있는지, 현지 주민들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고 필자의 조사 경험이 쌓이면서 그림이 제작된 시대의 차이, 지역과 장소의 차이, 제작 주체의 차이 등과는 무관하게 동질성을 띠는 몇 가지 요소를 변별해 낼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림이 그려진 유적의 공간적 특성으로, 그것은 시스티나 성당이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등과 같은 종교와 문화의 성역이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림 속 형상들로 주술사(sorcerer), (sex), 그리고 제작 당시의 문화 아이콘과 관련된 모티프들이 반복적이자 매우 구체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들은 시대와 지역, 제작 주체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범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있다.


난교 (키르기스스탄, 사이말르이 타쉬)

굽 동물과 임산부 (프랑스, 로주리 바스)


이 가운데 과 관련된 그림들은 하나로 묶어서 에로틱(erotic)’ 그림이나 코이투스(coitus)’ 등으로 명명한다. 여성기(女性器), 남녀양성구유(男女兩性具有), 성교(性交), 난교(亂交, group sex), 수간(獸姦, zooerastia) 등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선사 미술의 핵심 모티프 중 하나였다. 비단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품으로도 제작되었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또 때로는 상징적인 방법으로 성애(性愛)를 형상화했다. 이에 선사학자뿐 아니라 종교학·신화학·인류학·철학 등을 연구하는 이들은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가 견지해 온 성 담론의 본질을 다양한 각도에서 풀어내고자 하였다.


- 굽 동물과 임산부 (프랑스, 로주리 바스)

토우장식 장경호 (한국, 경주 황남동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성교 장면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임신한 여성, 출산 중인 여성, 성인 남녀와 어린이로 구성된 가족도 등도 그려진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장면에는 뿔과 굽이 있는 동물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 로셀의 각배를 든 비너스처럼 소뿔을 들고 있는 여신상이나, 터키 아나톨리아의 차탈 휘이크(Catal Huyuk) 유적 성소 벽기둥에 장식된 소머리뼈 등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 수태 기간, 여성의 골반, 남성의 힘을 상징하고 의미한다.


- 토우장식 장경호 (한국, 경주 황남동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사시장춘(四時長春) (한국, 신윤복의 작품) 국립중앙박물관


서양뿐만이 아니다. 중국의 바위그림 유적 현장에서도 이러한 유형의 그림들을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주제와 관련된 작품이 많다. 경주 황남동에서 출토된 국보 제195토우장식 장경호(長頸壺)’를 보면 성교 중인 남녀가 형상화되어 있고,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고려 시대의 노래들이 남녀상열지사라며 폄하되고 천시되기도 했으며,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조선 시대의 걸출한 화가들이 남긴 노골적이기도, 은유적이기도 한 춘화도(春畫圖)’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성()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본능적인 것임과 동시에,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는 주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또한, 현대에서는 피카소(Pablo Picasso)나 에곤 쉴레(Egon Schiele), 장 콕토(Jean Cocteau)와 같은 작가들이 남긴 에로틱 그림은 이 분야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이렇듯 인류가 표현한 성 담론 및 그와 관련한 조형 활동은 이른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러나 학계는 이와 같은 작품들을 오늘날의 포르노처럼 병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오래전부터 경계하였다. 필자는 앞으로 선사 및 고대인들의 성과 사랑에 관한 그림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또 연구하여, 그 밑바닥에 흐르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이 무엇인지 연구해 나갈 것이다